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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부 메르스 대처 실패에 지방 정치 득세 현상”

중앙선데이 2015.06.14 00:44 431호 8면 지면보기
13일 서울지역 메르스 집중 치료기관인 서울보라매병원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이 격리병동의 운영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2004년 10월 18일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국정감사장.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에 맞선 이명박 서울시장은 거침이 없었다. “수도 이전을 놓고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법’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 리더십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수도 이전을 막고 싶다”던 이 시장의 지지율은 ‘천막당사 기적’을 연출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단숨에 따라잡았다.

메르스가 바꾼 중앙지방정치 패러다임

#2015년 6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장. 모두발언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의 표정은 단호했다. “지자체가 중앙정부와 조율 없이 독자적으로 (메르스) 대응을 하면 국민이 더욱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를 묵묵히 받아 적었다. 그러곤 “어제 대통령이 메르스 총력 대응 체제를 마련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다”며 여유 있게 맞받았다. 이어 “대통령께 전국 시·도지사 회의 소집을 제안드린다”며 한발 더 나갔다. 박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결국 최경환 총리대행이 “내일 시·도지사 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대신 수락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 대한 대응을 놓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대립각을 세우면서 지자체장들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4일 밤 박원순 시장의 긴급 기자회견은 기습작전을 방불케 했다. 그는 서울시가 메르스 방역에 직접 나서겠다고 선언하며 확진 판정 권한 이양까지 요구했다. 다음날 청와대는 “불안감과 혼란을 키우는 상황이 우려스럽다”며 견제했지만 결국 7일 최 총리대행이 박 시장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정부의 초기 방역 실패로 인해 주도권이 박 시장에게 넘어간 모습이다.

이낙연 “박원순 심야회견 신중치 못해”
박 시장뿐만이 아니다. 남경필 경기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등 중앙 정계 출신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적극적으로 메르스 대응에 나서며 정치적 입지를 키우고 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중앙으로의 쏠림이 강했던 한국 정치에서 지방 정치인이 득세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하고 있다”며 “박근혜 정부의 초기 대처 실패가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라고 분석했다.

중앙정부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각자 스타일이 다르다. 박 시장의 대응은 대결적이었다. 같은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이낙연 전남지사가 “심야 기자회견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행정수도 이전 등을 놓고 노무현 정부와 각을 세우며 존재감을 키웠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을 연상케 한다. 이런 행보에 대해 대권주자로의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하려 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박 시장이 예정된 유럽 순방을 취소하자 미국 방문을 앞둔 박 대통령과 비교하려는 차별화 전략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런 시각에 대해 박 시장은 “촌각을 다투는 일인데 정부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중앙과 지방정부가 합심·협력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반면 또 다른 야권 차기 대권주자인 안희정 지사는 ‘협조’를 내세운다. “정부와 별도로 도지사가 책임지고 직접 지휘하겠다”면서도 “중앙정부와 각을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도지사 취임 이후 줄곧 중앙정부나 새누리당이 다수를 차지한 충남도의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써 왔다. 안 지사는 “전임자를 찍은 도민과 나를 찍은 도민이 다르지 않다. 시대정신에 따라 선택이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안 지사는 도의원도 주민이 뽑은 것이니 이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만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이라고 분석했다. 또 “박 대통령의 인기가 높은 충남 민심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남경필 지사는 ‘중재’의 아이콘이 됐다. 자신이 직접 김무성·문재인 여야 대표에게 연락해 7일 여야 지도부 4+4 회동을 성사시켰다. 8일엔 만남을 껄끄러워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박 시장을 한자리에 서게 하는 실무협의체 구성을 주도했다. 남 지사는 취임 직후부터 야당 추천 부지사를 임명하는 등 ‘소통’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우고 있다.

외형상으로 메르스 이슈로 가장 정치적 이익을 본 이는 ‘맞짱’을 택한 박 시장이란 평가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 따르면 6월 첫째 주(1~5일) 평균 13.8%였던 그의 지지도는 일주일 만인 12일 21.5%로 급등,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18.2%)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남 지사도 2.1→3.5%로 의미 있는 상승을 보였지만 중앙과의 대립을 피한 안 지사는 4.0→3.7%로 상승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새누리당 지지층 일부가 박 시장 지지로 돌아설 정도로 이념이 아닌 생활 밀착형 이슈에서 박 시장의 대응이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상곤 새정치연합 혁신위원장과 이재명 성남시장은 중앙정부나 보수여론과 대립각을 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진 지역 정치인의 또 다른 사례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까지 5년간 직선 경기도교육감으로 무상급식 확대와 혁신학교 등을 추진, 정부·여당과 마찰을 빚었지만 주민의 지지를 받으며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지난달 새정치연합 혁신위원장에 발탁되며 야권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우상호 새정치연합 의원은 “교육감 출신이 정치인으로서 뜰 수 있다는 건 독자적인 의제 설정 능력이 있음을 말해준다”며 “혁신위원장 취임 이후 내건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이나 계파 등록제 같은 발상을 보면 정치적 감각도 상당하다”고 평했다.

이재명 시장은 기초단체장으론 드물게 지난 4월 한국갤럽의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1%로 이름을 올린 데 이어 지난 12일엔 2%로 두 달 만에 두 배 상승했다. 그는 SNS를 통해 홍준표 경남지사와 무상급식 공방을 벌였고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야권 지지자 사이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메르스 정국에선 이 시장이 직접 SNS로 실시간 브리핑을 하며 주목받았다. 한 새정치연합 국회의원은 “당 지도부가 머뭇거릴 때 시원하게 지르고 나가는 강점이 있는 반면, 가끔 오버하는 바람에 아직도 안정감 있는 지도자 반열에 들었다고 보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광역 단체장에 매력적인 ‘MB 모델’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광역단체장은 대권으로 가는 주요 경로로 자리 잡았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광역단체장은 국회의원보다 행정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크고 선출직이란 점에서 장관보다도 대선 가도에 유리하다. 반면 본인의 정책에 책임을 져야 하고 평소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노출 빈도가 적다는 점은 불리하다”고 분석했다.

실패 사례도 적잖게 나왔다. 여의도에 대선 준비 사무실까지 차려놨던 홍준표 경남지사는 진주의료원 폐쇄와 무상급식 축소로 이슈 인물로 떠올랐다가 성완종 사태로 사실상 낙마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반대에 시장직을 걸었다가 주민투표 끝에 사퇴했다. 우상호 의원은 “이명박 시장 시절 추진한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개혁은 시민의 삶에 밀착된 사안이었던 반면 홍 지사와 오 전 시장이 제기한 이슈는 지역 현안을 정치 의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국구 정치인으로 뜨려는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다”고 비판했다. 최요한 정치평론가는 “지자체장을 대선 가도의 과정으로만 생각한다면 은연중에 심리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며 “박 시장 등도 정책으로 검증받는다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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