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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개방이 부른 ‘환란’ … 위기 앞에서 한국은 하나였다

중앙선데이 2015.06.14 01:03 431호 10면 지면보기
제일은행 마지막 날을 담은 영상 ‘내일을 준비하며’(일명 눈물의 비디오·작은 사진)를 촬영한 이응준씨가 서울 종각 옛 제일은행 본점(왼쪽 건물) 앞에 서 있다. 김춘식 기자
1998년 새해 벽두, 당시 ‘조한제상서’(조흥·한일·제일·상업·서울)로 불리던 5대 시중은행의 하나인 제일은행은 48개 영업점을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안을 내놨다. 한국 경제를 통치했던 국제통화기금(IMF)은 한보·기아·진로 등의 줄부도로 부실은행으로 전락한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을 폐쇄하라고 압박하던 터였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을 살린 뒤 외국자본에 팔겠다고 읍소했다. 불과 1년여 전 법인세 납부 1위, 당기순익 초과 달성의 제일은행에서 은행권 사상 최초로 명예퇴직이란 걸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5> 세계화의 그늘과 90년대

 통폐합 대상엔 실적 1위였던 서울 강남 테헤란로지점도 포함됐다. 당시 제일은행 본사 홍보팀에 근무하던 이응준씨는 테헤란로지점의 마지막 날을 영상에 담았다. 영상 속의 한 여성 행원은 “제일은행을 꼭 다시 일으켜 주세요”라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이를 본 국민도 따라 울었다. 더 놀라운 건 이미 퇴직 통보를 받은 행원들이 밤늦게까지 묵묵히 여신정리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들의 입에선 “남은 사람들은 잘되길 바란다” “우리가 나가야 회사가 활력을 찾을 것”이라는 지금으로선 믿기 어려운 말들이 나왔다.

 이씨는 “당시엔 무조건 IMF가 시키는 대로 할 때였다”며 “한국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항변하려고 해도 ‘선진 금융’이란 단어만 나오면 모두 죄인처럼 따랐다”고 말했다. 이듬해 겨우 5000억원에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털은 5년 후 1조1500억원의 차익을 남기며 은행을 되팔았다. 한국엔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뉴브리지캐피털로부터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차타드는 SC제일은행이라는 상호를 쓰다가 2012년 ‘제일’을 빼버렸다. 제일은행을 다시 일으켜 달라던 여성 행원의 절규는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됐다. 이씨는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하고 대량 퇴직을 단행했으면 은행이 잘됐어야 했는데 지금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며 “무엇을 위한 희생이었는지 반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위기 다가오는데 “펀더멘털 튼튼” 오판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이듬해 세계화를 국정 어젠다로 내세웠다. 세계시장으로 더 공격적으로 나가자는 일종의 경제 민족주의였지만 미국과 유럽은 한국시장 개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사실 미국은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요구해 왔다. 정부는 이를 선진국 클럽 가입으로 홍보했지만 한국 시장을 개방하라는 선진국의 압박이라는 측면이 있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은 한·미 동맹보다 늘어나는 대한(對韓) 무역수지 적자 해결을 급선무로 여겼다.

 96년 9월 12일 한국은 OECD 회원국이 됐다. 문제는 한국이 시장 개방, 특히 자본시장 개방에 제대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는 가입 직전 우리 정부가 ‘OECD 가입 후에도 개발도상국으로서의 지위를 일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OECD 가입을 이루던 해 한국 경제는 연착륙에 실패했다. 성장률은 낮아졌고 경상수지 적자는 220억 달러로 늘었다. 수출 부진과 재고 누적 속에서 체감경기는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OECD 가입 1년2개월 만에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신세가 됐다. 섣부른 시장 개방이 단기 외채의 대량 인출로 이어져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것이었다.

 97년 초 동남아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이 튼튼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공언했다. 93~96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에 달했다는 게 근거였다.

 하지만 대기업의 과도한 단기 외채를 통한 문어발식 확장이 문제였다. OECD 가입으로 신용등급이 올라간 국내 기업들은 외채를 더 쉽게 빌릴 수 있었다. 단기 외채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상태에서 경제가 불안정해지면서 외국인들은 채권을 일제히 회수했다. 떠나가는 달러 자금이 밀려들자 외환시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정부는 대기업을 직접 지원할 수도 없었다. 결국 빚 많은 기업들부터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가혹한 처방에 기업가계 파산 쓰나미
IMF는 금융시장 개방, 국영기업 민영화, 재벌 지배체제 개혁, 노동시장 유연화 등 4대 개혁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이에 따라 30개 대기업 집단 중 절반 정도가 정리됐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실업 사태가 발생했다. 98년 상반기엔 매달 10만 명 정도의 신규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전시경제에 준하는 수준의 대대적인 직업 재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사견을 전제로 나오기도 있다.

 IMF는 또 환율·국제수지 방어와 고강도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고금리 정책을 강요했다. 당시 연 40%를 상한으로 제한하던 이자제한법도 폐지했다. 고금리는 기업과 가계의 ‘파산 쓰나미’를 일으켰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IMF의 자본 자유화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금리를 내렸다. 링깃화를 달러화에 묶어 고정환율제를 실시했으며, 말레이시아로 들어온 외화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자본통제를 고수했다. 결과론이지만 말레이시아의 처방이 훨씬 고통이 덜했다.

 가혹한 거시 처방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국민의 집념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금 모으기 운동이 단적인 예다. 물론 많은 참여자는 헌납보다는 위탁을 택했고, 그 경우 시중가보다 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금덩어리들이 각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물건인 점을 생각하면 나라 걱정하는 마음만은 여느 나라와 달랐다. 동남아 국가의 한 관계자는 당시 “어떻게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자산을 나라에 바칠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내가 아무리 부자라도 나라가 망하면 다 소용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자 그는 더 이상하다는 듯이 “나라가 망하면 그 금을 더 잘 챙겼다가 해외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현재 국가부도 위기에 놓인 그리스 국민의 사뭇 다른 반응은 한국인이 17년 전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대조된다.

3년 만에 위기 극복했지만 카드 사태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고단했다. 기업들은 자산을 매각해 부채비율을 낮추고, 수익성이 불확실한 투자를 억제했다. 워크아웃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구조조정이 실시됐고 빅딜이라는 시장용어 뒤에서 정부가 대기업들의 영역 조정을 강요했다. 이렇게 금융과 산업을 정리하는 동안 고환율을 바탕으로 수출경쟁력이 향상됐다. 무역수지 흑자가 점차 쌓여갔다. 국내로 유입되는 외화가 늘자 바닥을 보였던 외환보유액도 채워졌다. 이는 IMF 채무 조기 상환으로 이어졌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듬해 8월 23일에는 구제금융 자금 195억 달러를 모두 갚고 IMF 관리체제를 졸업했다. 김 대통령은 그날 경기도 광명시 기아차 소하리 공장을 찾았다. 그는 “기아차 하면 외환위기가 생각나던 시절이 있었다”며 “기아차가 당당히 갱생해 해낼 수 있다는 산 교훈을 보여준 데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위기극복 노력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미셸 캉드쉬 전 IMF 총재도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 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외환위기에서 벗어난 김대중 정부는 성장 전략을 바꾼다. 대기업 위주에서 정보기술(IT) 벤처 육성으로 비중을 옮긴 것이다. 벤처 붐이라고 할 정도로 1년에 수만 개의 벤처기업이 탄생했다. 지금 한국의 IT 및 소프트웨어 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1세대 벤처기업들은 다 그때 생겼다. 벤처 붐은 277에 머물던 주가지수를 2년 만에 1000 너머까지 끌어올렸다.

비정규직 늘어나며 양극화 불거져
경제를 조기에 회복시키려다 보니 무리도 뒤따랐다. 내수 진작에 몰두하다 카드 사태라는 또 다른 불씨를 남긴 것이다.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내수를 진작하려다 보니 신용카드 발급을 남발했고, 이는 다시 신용불량자를 양산해 경제에 타격을 줬다. 이래저래 서민은 힘든 나날이었다.

 국가부도 위기는 노동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위기 상황에서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에선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비정규직 비율은 2002년 27.4%에서 2007년 35.9%로 증가했다. 지금도 피고용자의 30% 정도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남성 임금은 정규직의 48%, 비정규직 여성은 더 낮은 38%에 불과하다.

 고용 위기는 사회 위기로 이어졌다. 가장들이 실직하면서 이혼이 급증했다. 96년 약 7만9000건에 불과했던 이혼 건수는 2003년 16만7000건으로 급증했다. 80년에 비해선 무려 4배 정도 높아졌다.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았다.

 자살도 심각한 문제다.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3위다. 외환위기 직후부터 자살률이 급등하기 시작해 2003년 OECD 1위가 됐다. 하루 42명 자살이라는 수치는 OECD 평균의 3배다.

 고령화가 가속되면서 사회적 위기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수명은 늘어나지만 퇴직 연령은 오히려 낮아져서 소득이 없는 노후의 빈곤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평균 퇴직 연령이 53세에 불과해 현재 65세 이상의 노인 절반 정도가 빈곤층이다. 80대 이상 노인의 자살률이 20·30대에 비해 5배 높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론 한국의 복지 지출은 96년 국내총생산(GDP)의 3.9%에서 2010년 9.4%로 늘었다. 하지만 빈곤율 역시 96년 11.2%에서 2010년 17%대로 늘었다. ‘과소 복지’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게 이어져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 공약이 유세장을 뒤흔들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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