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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침대는 과학, 메르스는 정치

중앙일보 2015.06.11 00:26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내 피에 문제가 있다(과학적으로 말하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19년 전 수습기자 시절이다. 입사 동기들과 단체 헌혈에 나섰을 때다. 순서대로 헌혈 버스에 올랐는데, 피를 뽑기 전에 작성해야 하는 문진표에 ‘아니요’ 쪽에 열심히 체크를 하다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예’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광우병(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원산지인 영국에 살았던 게 문제가 됐다. 동기생들이 다들 들고나온 오렌지 음료도 없이 허탈하게 버스에서 내렸고, 이후 헌혈은 내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리스트에 추가됐다. 오늘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를 보니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영국에서 1개월 이상 체류한 자’는 여전히 헌혈 금지자로 분류돼 있다.



 잊고 지내던 피의 불순 문제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2008년 이른바 ‘광우병 파동’ 때였다. 광우병 걸린 소를 먹으면 수십 년 뒤에도 갑자기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광우병 보균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나 같은 ‘위험군’에게는 끔찍한 악담이었다. 이후 한동안 순간적인 안면 인식 애로나 이름 기억 장애가 나타나면 뇌에 생긴다는 스펀지 구멍을 상상하게 됐다.



 영국 또는 광우병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2011년부터 2년 반 동안 다시 그 땅에 살았다. 공식 기록상 광우병으로 176명이 숨진 나라다. 잠재적 위험자는 수십만 명이다. 그쯤 되면 온통 난리가 났을 법한데 광우병 얘기를 꺼내는 사람을 보기도 힘들었다. 식당에서는 미트볼 스파게티나 햄버거가 여전히 인기 메뉴였다. ‘소의 사료를 바꿔 더 이상 광우병 소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전문가가 검증한 정부 발표를 대개들 믿고 있다고 봐야 했다. 꺼림칙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 의연했다. ‘과학’에 도전하는 비합리성을 보여봤자 그만 우스워 보일 분위기였다.



 메르스 사태로 아파도 병원에 안 간다는 사람이 많다. 전북 순창에 전체가 격리된 한 마을이 있다는 이유로 순창산 고추장이 기피 상품이 됐다. 급기야 행자부 장관이 9일 순창에 가 고추장 시식 행사를 가졌다. ‘침대도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리고 어느새 메르스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퍼뜨리지 말자고 하면 친여 세력이 되고 확산 위험을 강조하면 반정부 인사가 되는, 모든 주장을 정치로 빨아들이는 ‘정쟁의 블랙홀’이 여지없이 등장했다. 그 바람에 과학은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난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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