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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3300년 전 트로이 목마, 65년 전 6·25 … 노림수는 ‘기습’

중앙선데이 2015.06.07 03:00 430호 28면 지면보기
1950년 6월 8일자 로동신문 1면에 보도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대남 평화통일 호소문.
▶ 6월15~17일 조국평화통일 사회단체대표자협의회를 해주 혹은 개성에서 개최 ▶ 8월5~8일 남북총선거를 실시 ▶ 8월15일 최고입법기관회의를 서울에서 소집

<19> 기습과 방어의 기본

북한정권이 1950년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우리조국 남북반부의 전체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들”과 “전체조선인민들에게” 제의한 평화통일 방안이다. 이 호소문 발표 후 18일 만인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도발 직전의 평화 호소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북측은 평화통일을 위한 최후의 노력이었다고 강변하겠지만 남측으로서는 북측의 철저한 속임수로밖에 볼 수 없다.

6월 25일 직전까지 대화 공세 편 김일성
남북총선 및 평화통일의 제의가 있었던 6월 초순은 김일성 정권이 남한을 무력침공하기로 이미 결정해둔 상황이었다. 1949년 3월 스탈린을 면담한 김일성은 무력침공에 관해 소련 의견을 물었다. 스탈린은 이에 소극적이다가 중국 내전 종식과 미국 애치슨 선언 이후인 1950년 4월에서야 무력침공에 동의했다. 5월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과의 회담에서 중국 동의도 얻었고, 또 남한 내 좌파의 전폭적 지원도 기대했다.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모두 미국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남측이 기습에 대비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1950년 6월 전쟁 직전까지의 북한 대남 정책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북한 정권은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의 호소문에 이어 10일에는 북한에서 연금된 조만식 부자를 남한에서 체포된 남로당 출신 사형수 김삼룡·이주하와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정부가 교환을 수락하자 북한 정권은 20~23일 여러 차례에 걸쳐 교환 장소와 일시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는 21일 서울에서 남한 국회와 협상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북한의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 남한은 처음엔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채병덕 참모총장 명의로 11일 오후 4시부터 경계령을 내렸지만 23일 자정을 기해 해제했고 25일 새벽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침공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북한 정권의 행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원전 13세기의 트로이 목마를 연상시킨다. 트로이군과 오랜 전투를 벌이던 그리스군은 목마를 둔 채 일단 철수했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은 무슨 물건인지 모르니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트로이에 위장 투항해 있던 시논이라는 그리스 첩자는 목마가 전쟁승리의 영물이며 트로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크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라오콘이 갑자기 나타난 뱀에 물려 죽자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성 안으로 가져갔다. 감시가 느슨했을 때 그리스 병사들은 목마에서 나와 성문을 그리스 정규군에 열어줬다. 결국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점령하고 파멸시켰다. 여기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적을 조심해라”는 뜻의 “선물 든 그리스 사람을 조심해라”는 표현이 나왔다.

1 앙리 모뜨의 ‘선물 든 그리스사람을 조심해라’(1874년작) 2 뱀에게 물려죽는 라오콘 3부자를 그린 엘 그레코의 17세기 유화. 라오콘 뒤로 트로이목마와 트로이성이 보인다.
불신도 기습과 기만에 대한 대비책
기원전 13세기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1950년의 북한 정권도 상대 지도부와 화해할 생각이 없었고 또 화해를 제의한다고 한들 상대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은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호소문에서 이승만 정권을 적대시하고 배제함을 분명히 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파탄시킨 범죄자들인 이승만·이범석·김성수·신성모·조병옥·채병덕·백성욱·윤치영·신흥우 등 민족반역자들을 남북대표자 협의회에 참가시키지 말 것”과 “조국통일사업에 유엔조선위원단의 간섭을 허용하지 말 것” 그리고 “조선인민은 외국의 간섭이 없이 반드시 자력으로 조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성문을 열어달라는 요구를 남측의 사회단체에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전쟁을 원했거나 전쟁 중 북측에 부역한 남측 주민들은 북한의 기대와 달리 소수였다.

6·25전쟁은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됐다. 20세기 동아시아에서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전쟁은 적지 않다. 일본이 1904년 뤼순 러시아함대 그리고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함대를 공습할 때 모두 선전포고는 없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던 순간까지도 평화적 해결방안을 미국 정부에 거론했다.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북한도 그랬다. 이런 평화 제의들은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평화공세 혹은 거짓임을 강조하여 위장평화공세로 불린다.

36계 등 전략론 문헌 다수는 주로 속고 속이는 것을 다룬다. 손자병법 행군편은 상대의 표면적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겸손한 말로 더욱 준비하는 자는 공격하려는 것이고(辭卑而益備者進也), 강경한 말로 더욱 공격하는 자는 퇴각하려는 것이며(辭强而進驅者退也), 아무런 약속 없이 강화하자는 자는 속이려는 것이다(無約而請和者謀也). 이 경구에 따르면 북한 매체의 대남 발언도 과거나 지금이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손자병법식으로 의도와 초기 행동을 늘 정반대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언행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 공격할 의도 없이 온건하게 표현하는 자도 있고, 또 강경한 말을 구사하면서 실제로 공격하는 자도 있다. 적대적 상대의 발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아예 무시하는 것이 상대 의도에 말리지 않는 길이다.

민주주의는 철인 정치지도자 불신의 산물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의도를 속단하지 말라는 경구는 손자병법뿐 아니라 여러 고전에 등장한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구밀복검(口蜜腹劍), 포장화심(包藏禍心) 등이 그런 사자성어의 예다. 당나라 이의부는 ‘늘 미소를 짓지만 남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찬(笑中有刀)’ 인물로 평가됐다. 이의부는 당 태종과 당 고종의 신임으로 온갖 권력을 누리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나라 현종 때의 이임보 역시 ‘말은 달콤하지만 마음은 위험한(口蜜腹劍)’ 인물로 평가됐다. 이의부와 마찬가지로 말년과 사후가 좋지 않았다.

상대의 나쁜 의도가 의심되면 이를 확인해서 대비해야 한다. 춘추시대 강대국인 초나라의 공자와 약소국인 정(鄭)나라의 대부 딸이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초나라는 혼례에 참가하는 병력으로 정나라를 쉽게 점령하려 했다. 초나라는 성 밖에서 혼례를 치르자는 정나라의 제의를 거부하고 예법에 맞게 성 안에서 혼례를 치르자고 했다. 초나라는 정나라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오히려 불만을 표했다. 이에 정나라는 초나라가 ‘나쁜 마음을 감추고’(包藏禍心) 있는지 정면으로 묻고, 나쁜 마음이 없으면 혼례에 비무장으로 참가할 것을 제의했다. 결국 초나라 사람들은 비무장한 채 정나라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대가 불신에 불쾌감을 표하면 표할수록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습은 도발자에게 큰 이점이 있다. 기습은 반격할 여지를 상대에게 주지 않고 싸움을 일찍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습작전은 시간과 공간 가운데 하나에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상대의 공간적 혹은 시간적 반격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기습의 유형 하나는 특정지역 예컨대 접경지역이나 수도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여 상황을 종료하는 방식이다. 제한적 공간의 성공적 점령은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는 상대에게서 반격할 시간(타이밍)을 빼앗는다. 기습의 다른 유형 하나는 상대의 공격력을 파괴시켜 아예 반격의 빌미를 주지 않는 방식이다. 장악한 지역이 거의 없다고 하더라도 제한된 시간 안에 상대의 대량살상무기를 전멸시킨다면 상대는 반격할 공간(베이스)을 잃게 된다. 이 유형에선 기습공격의 목표물이 민간시설보다 군사시설이다.

기습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먼저 방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완벽한 방어가 어려워 결국 억지 기능으로 대비할 때가 대부분이다. 자국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방어 시스템보다, 도발자에게 피해를 최대화하는 반격 시스템으로 도발을 억지하는 것이다. 억지가 작동하려면 무엇보다도 상대에 반격할 수 있는 군사력이 기습공격을 받은 후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 반격할 때의 목표물은 상대의 군사시설보다 정책결정자 거주지나 주요 민간시설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기습·기만 성공해도 패망 사례 많아
기습에 잘 견디는 장치 하나는 동맹이다. 왜냐하면 동맹국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선제공격으로 무장해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선 1953년 정전된 이후 전쟁이 재발하지 않고 있다.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하고 근현대 전쟁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하고 있는 현재의 정전 상황은 한반도 안보상황이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억지 시스템으로 60년 이상 전쟁 재발 방지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 억지의 주요 구성요소는 미국 및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었다.

불신 또한 기습과 기만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다. 믿지 못하는 상대를 둔 상황에서 생존과 관련하여 아무런 안전장치를 갖추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행동이다. 적대적 관계에서 상대를 무조건 신뢰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내정치에서도 민주주의 자체가 불신에 기초한다. 전권을 받은 특정 국가지도자 1인에 의한 철인(哲人)정치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시스템이나, 그런 지도자의 행동을 믿을 수 없으니 민주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기습에 대한 대비책 하나는 기습이다. 기습당하기 전에 먼저 기습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기습할 동기가 충분하다고 그 상대가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내가 기습받을 가능성은 커진다.

기습이 효과적이지 않을 때에는 평화공세나 위장평화공세의 효능도 떨어진다. 남을 속이는 데에 성공해봤자 얻을 게 크지 않다면 굳이 속이려들지 않는다. 따라서 화해나 평화의 진정한 제의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려면 속임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기습과 기만은 단기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종국에는 패망에 이른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신뢰는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하고, 국가신뢰 역시 외교적 자본으로 활용된다. 신뢰를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 한 차례의 기습·기만 성공보다 나음은 말할 나위 없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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