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밀도 높아 불안 확산도 빨라 정보 투명해야 ‘메르스 공포’ 진정

중앙선데이 2015.06.07 00:48 430호 5면 지면보기
마스크를 쓴 외국인 관광객들이 5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보고 있다. 전통 복장 체험 행사는 메르스 여파로 당분간 중단됐다. 김춘식 기자
지난 2일 한 인터넷 게시판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자가격리자라고 밝힌 남성의 글이 올라왔다. 33세 독신자라는 그는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아침부터 굶고 있다”고 했다. 회원들은 “보건 당국에 음식을 보내 달라고 해라”거나 “가족들에게 현관 앞에 음식을 놓고 가라고 해라”는 등의 조언을 남겼다.

[메르스 쇼크] 국민 불안심리 잠재우려면

이를 마지막으로 그의 글은 6일까지 나흘째 올라오지 않고 있다. 회원들의 불안감도 커졌다. 확진 판정을 받았을 거란 추측이 난무했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메르스 사태가 확산되면서 시민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감염 의심자가 자가격리 지시를 어기고 무단 외출하거나 해외 출장을 떠난 사례도 나왔다. 전염병의 발병과 확산으로 인한 혼란을 다룬 영화와 소설은 많았다. 최근에도 영화 ‘감기’(2013)나 정유정씨의 소설 『28』(2013) 등이 전염병으로 인해 인간성이 절멸되는 상황을 그렸다. 혼란 상태 속에 국가와 개인 사이의 유기적 결합이 끊어지는 순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 거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이다. 불안감의 증폭과 확산, 시민의식의 부재-. 사회과학자들과 함께 메르스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분석해 봤다.

낯선 질병일 때 불안감은 증폭
불안감을 느끼는 심리적 기제는 ‘낯선 것’ 혹은 ‘위협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촉매는 정보의 부족이다. 내 생명을 위협하는 낯선 것이 등장했을 때 충분한 정보가 없다면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나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질병이 발생했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다. 심리학자들은 불안감이 증폭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질병이 발병하고→사망자가 발생하면→전염 공포로 타인을 적대시하며→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으면→불확실한 정보에 의존하거나 루머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확한 정보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낯선 대상이 질병일 경우 불안심리가 증폭된다”고 분석했다. 전 교수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건 발병 초기 정부가 신속하게 타당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공적인 정보 제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자기 보호를 위해 자발적인 정보 획득에 나서게 되고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노출된다”고 말했다.

불안감 확산과 관련해 우리 사회만의 특성이 있는지에 대해 사회과학자들은 ‘일정 부분 영향이 있다’고 동의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의 사회적 밀도(Social Density)에 주목한다. 김 교수는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밀집돼 있는 데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같이 개인 간 상호작용이 활발한 우리나라에선 사건의 파급속도가 대단히 빠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특성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기능하는 건 아니다. 김 교수는 “자기 삶과 직결된 이슈에 있어 투명한 정보가 제공되고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이른바 ‘괴담’으로 인한 혼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우영 교수도 “적절한 정보와 조치가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 ‘불안해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며 “정확한 정보 제공이 이뤄졌다면 오히려 SNS의 파급효과가 긍정적으로 기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사회가 비공식 정보를 선호한다기보다 공식 정보에 대한 선험적 불신이 불안을 확산시켰다는 의미다.

‘공익 행동=개인 이익’ 믿음 심어줘야
자가격리 지시를 따르지 않은 감염 의심자들의 행동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일각에서 질타하듯 시민의식의 부재 때문일까. 사회과학자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 형성된 과정에 주목한다. 이들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사회계약론(Theories of Social Contract)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공리주의는 개인 행복의 총합이 사회 전체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믿음이다. 군주국가나 유교사회에서처럼 무조건 정부에 복종하거나 대의(大義)를 위해 소아(小我)를 버려야 한다는 게 아니라 철저히 계약에 의한 신뢰관계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개인의 공익적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선 국가와 사회가 단기적으론 개인의 이익이 유보될지라도 장기적으론 이익이 될 것이란 믿음을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메르스와 같이 고위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공익에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은 김 교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국가와 구성원 간 신뢰나 계약관계가 명확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신뢰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공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무조건 제한해야 한다는 것은 전근대적 발상”이라며 “사익과 공익이 타협점을 찾기 위해선 이를 매개하는 공직자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신뢰가 없다면 개인이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상황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공익적 행동과 사익적 행동 가운데 무엇이 합목적적 행동인지를 분석할 수 있다. 한성안 영산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선 미시적 행위자(개인)의 합리성을 신뢰하고 케인스 경제학에선 거시적 행위자(국가기관이나 공식제도)의 합리성을 신뢰하지만 현대의 진화경제학에선 어느 쪽도 완벽할 수 없다는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국가와 개인 어느 쪽도 합리적인 선택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그동안 경제학에서의 합목적적 행위는 이익(interest)을 추구하는 것이고 도덕이나 정의 같은 가치관을 배제해 온 경향이 있다”며 “현대 사회에서 어느 것이 합목적적이고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인지 판단하기 위해선 합리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공동체와 개인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를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과학자들은 우리 사회가 ‘보상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국가에 대해 무조건적 추종이나 불복종의 태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계약관계와 보상의 규칙을 만들어 사회적 삶 속으로 국가와 구성원이 포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기 교수도 “미국 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였던 라인홀드 니버가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했듯 도덕적인 개인만으로 사회정의를 이룰 수 없고 공익의 명분만으로 도덕적 개인을 강제할 수 없다”며 “타자에 대한 배려를 했을 때 미래에 기대이익이 있다는 믿음, 약속이 선험적으로 자리 잡아야 국가·사회·시민이 공동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