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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박해받던 신교도의 해외 탈출이 프랑스 쇠락의 원인

중앙선데이 2015.06.07 02:01 430호 20면 지면보기
그림 1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가톨릭 신앙의 알레고리』, 1670~1672년.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한 화가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보인다.
그림 1은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가 그린 ‘가톨릭 신앙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여성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의인화한 것이다. 저명한 화가의 작품이니만큼 여러 미술사학자들이 이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해 해설을 하였다. 사과는 원죄를 상징하고, 초석에 짓눌린 뱀은 예수에게 제압된 악마를 상징한다. 주인공의 옷은 순수함(흰색)과 하늘(파란색)을 의미하는 색이며, 손짓은 독실한 믿음을 뜻한다. 신앙은 ‘지구를 발아래 두는’ 것이며, 투명한 구체, 즉 무한한 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26> 16세기 종교개혁과 경제발전

이런 여러 상징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왼편의 태피스트리이다. 평상시에 주인공의 가톨릭 신앙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태피스트리로 가린다는 뜻이지 않은가! 주인공이 앉아있는 곳은 가정집에 몰래 마련된 기도실인 듯하다. 그림의 제작 시점에 네덜란드는 신교(프로테스탄티즘)를 공식 종교로 채택하고 있었다. 베르메르는 혼인을 앞두고 신교에서 구교(가톨릭)로 개종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림 1은 화가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 그림으로 볼 만하다.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지 못하는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떳떳하게 드러내놓지 못하는 시대였음을 그림 1은 보여준다. 이런 시대상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사제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톨릭교회의 면벌부(免罰符)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라는 문서를 게시하였다. 교회의 권위에 정면도전한 루터에 대해 교회는 주장을 철회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루터가 이를 거부하고 교회와 교리 논쟁을 계속하자 교황은 루터를 교회로부터 추방했다. 그러나 루터의 교회개혁 사상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때마침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제 활판인쇄술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루터와 여타 개혁가들의 주장은 인쇄물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여,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에 불을 댕겼다. 인쇄술 보급은 오늘날의 인터넷혁명에 버금가는 정보혁명이었다.

그림 2 에두아르드 쇤, 『루터, 악마의 백파이프』, 1535년경. 루터의 사상을 공격하는 그림이다.
그림 2는 구교 진영에서 루터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보여준다. 화가 에두아르드 쇤(Eduard Schoen)은 루터를 악마가 부는 백파이프로 묘사하였다. 루터의 사상이 악마에 의해 조종받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신교 진영에서 구교 진영을 공격하는 그림도 많이 제작되었다. 양측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반복되었고, 그 속에서 갈등의 골을 깊어져만 갔다.

16~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곳곳에서 본격적인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신앙적 차이가 불관용으로 불거지고 이것이 탄압을 낳고 결국 대규모 내란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종교개혁 운동은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속적 이해관계와 뒤얽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헨리 8세가 구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 성공회를 세운 이유는 단지 구교가 자신의 이혼을 반대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단절로 그는 전국에 산재한 구교 교회와 수도원의 엄청난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도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고자 한 제후들이 신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30년 전쟁(1618-1648)으로 절정까지 치달은 유럽의 종교전쟁은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국가 간의 국제법적 관계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었고, 종교적 관용 원칙에 따라 구교와 신교인 루터파, 칼뱅파는 모두 독립적 지위를 획득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교국가들이 북유럽과 서유럽에, 그리고 구교국가들이 남유럽과 동유럽에 포진했다.

종교개혁은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남긴 경제적 영향은 강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이었다. 특히 신교도와 구교도가 각자의 종교 성향에 맞는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함으로써 유럽의 경제적 지형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의 사례였다. 16세기 말 프랑스의 종교 갈등은 학살과 전쟁으로 비화하였다가 1598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칙령의 선포로 일단락된 듯 보였다. 그러나 1685년 루이 14세가 퐁텐블로칙령을 내려 낭트칙령을 무효화하자 위그노는 다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림 3 고드프루아 엥겔만, 위그노를 위협하는 용기병, 1686년.
그림 3은 위그노를 소총으로 위협하여 구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는 구교 병사의 모습을 묘사한다. 퐁텐블로칙령이 선포된 직후를 배경으로 고드푸르아 엥겔만(Godfroy Engelmann)이 그린 작품이다. 구교 병사들은 ‘드래곤’이라는 소총을 소지한 탓에 용기병(Dragonnades)이라고 불렸다. 용기병들은 위그노 집에 제멋대로 머물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심지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위그노에게 개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무자비한 박해 속에서 위그노는 해외로 탈출을 감행했다. 1685~1689년 사이에 적어도 20만 명의 위그노가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스위스 등으로 이민을 했다. 루이 14세 아래에서 오래 재정총감으로 일하며 프랑스의 중상주의를 이끌었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는 위그노 탄압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줄 거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의 경고는 적중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이주는 빈곤, 기근, 실업과 같은 경제적 원인이 배경이 되었다. 그 경우 이주민은 교육과 기술수준이 낮은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위그노의 경우 교육수준이 높고 직업적으로도 상공업자와 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해외이주는 프랑스에서 심각한 ‘두뇌유출’을 의미했다. 실제로 비단제조, 보석가공, 시계제조, 가구제작에 정통한 위그노 장인들이 외국에서 새롭게 산업발달의 기틀을 마련해갔다. 프랑스는 이미 네덜란드와 영국에 비해 국제무역에서 뒤쳐져 있었는데, 이제 숙련기술과 전문지식을 가진 인력을 경쟁국들에 빼앗겼으니 국가가 입은 타격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프랑스의 산업 경쟁력이 낮아지면서 국가재정은 더욱 궁핍해져 갔다. 훗날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고난의 길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자비한 박해 피해 위그노 해외 탈출
종교개혁의 경제적 영향을 가장 거시적 시각에서 논의한 인물은 막스 베버(Max Weber)였다. 그는 1904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신교국가와 구교국가의 역사적 경제성과를 비교하고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제시하였다. 신교의 금욕적 윤리가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고취시켜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내용이었다. 즉 교회의 가르침이 세속의 영리활동에 긍정적인 방향이었기 때문에 신교도들이 더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베버는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주장을 뒤집어 종교라는 상부구조가 경제에 영향을 강하게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세기를 뜨겁게 달군 역사적 대논쟁의 시작이었다.

종교는 세계화를 이끄는 중요한 힘의 하나였다. 종교의 형성과 전파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사상과 가치관을 흡수하고 교류하고 배척했다.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은 종교를 넘어 경제 전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유럽의 종교개혁만큼 이를 잘 보여준 사례도 드물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게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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