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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한국 지하철은 새 도화지 … 외국 낙서꾼 70~80명 줄 서

중앙일보 2015.06.06 01:27 종합 13면 지면보기
“홀트레인(Wholetrain)을 못한다면 차라리 그라피티를 그만두겠어.”


지하철 차량에 낙서 ‘그라피티’ 급증
외국어 강사 등으로 신분 숨기고 3~4명이 팀 만들어 조직적 활동
사전 답사, 모의 연습 등 치밀한 계획 … “30분이면 충분” 낙서 후 본국 도주

 2006년 독일에서 개봉된 영화 ‘홀트레인’에서 주인공이 한 말이다. 홀트레인이란 한밤중 몰래 차고지에 들어가 전차 전체를 그림으로 채운다는 의미의 힙합 용어다. 홀트레인 도중 동료가 사고로 숨지는 일을 겪고도 주인공은 끝내 그라피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언더그라운드의 일탈처럼 보이는 이런 행동이 그들에겐 영혼을 건 작품 활동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그라피티에는 그들이 숭배하는 힙합 정신의 일면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대중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이기도 하다. 전 세계 지하철이 홀트레인으로 몸살을 앓는 가운데 그들의 무대가 힙합의 변방인 한국으로 옮겨 오고 있다. 왜 그들은 한국 지하철을 노리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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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 나온 그라피티는 빙산의 일각=외국인에 의한 한국 지하철 원정 범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지난 3월이었다. 호주인 A씨(26) 등 4명이 2월 2~5일까지 왕십리역·안암역·신논현역에 있는 지하철 차량에 잇따라 그라피티를 남기고 본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알려지면서다. <중앙일보 3월 17일자 12면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그라피티 소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인 B씨(24)와 독일인 C씨(29)는 3월 8~12일 서울·대구·인천 지하철에 그라피티를 그린 뒤 자국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23일엔 서울 명동파출소 옆 상가 벽에 낙서를 한 한국계 독일인 김모(32·여)씨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코레일이 관할하는 수도권 지하철·철도 구간에서 발생한 그라피티 사건은 2013년 1건 ▶2014년 14건 ▶2015년(1~5월) 8건.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서울·대구·부산 지하철 범죄까지 합치면 외국인에 의한 그라피티 증가세는 매우 가파르다. 익명을 원한 철도 관계자는 “언론에 노출된 그라피티 범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사건이 발생해도 일이 커질까 봐 경찰에 알리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국토부 산하 서울지방철도경찰대의 김현모(41) 수사3팀장은 국내 유일의 그라피티 전문 형사다. 지난달 6일 서울 양천구 신정차량기지에서 그라피티 범행을 저지르려던 라트비아인 H씨(22) 등 3명을 붙잡은 것도 그가 몇 개월간 잠복한 끝에 얻어 낸 성과다. 그라피티 형태만 보고도 낙서범의 국적, 범행에 사용한 스프레이 등 각종 정보를 파악한다. 김 팀장은 “그라피티의 ‘그’ 자만 들어도 신물이 올라온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라피티 얘기가 시작되면 눈빛이 달라진다.



 ◆외국인 그라피티 낙서범 7~8개 조직=거대한 그라피티를 혼자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3~4명의 협업으로 그려진다. 절단기와 랜턴 등 각종 장비가 동원되는 홀트레인의 경우 협업의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이렇게 협업을 하는 그룹을 ‘크루(Crew)’라고 부른다. 팀(Team) 개념이다. 김 팀장은 “객차에 새겨진 모든 태그네임(Tagname·일종의 낙관)을 해외 그라피티 관련 사이트에서 일일이 대조해 본 결과 한국 지하철을 범행 목표로 삼는 해외 크루는 7~8개 조직으로 좁혀진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하나의 크루가 10명 안팎으로 구성된다. 70~80명의 외국인이 한국 지하철을 노리고 있는 셈이다. 이미 그라피티 포화 상태인 외국 지하철과 달리 한국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새 도화지’를 찾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범행 목표로 삼는 배경으로 분석된다.



 최근 국내 지하철 그라피티 범죄를 분석해 보면 외국인들이 서울 지하철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이들은 그라피티 목적으로 단기 체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왕십리역(5건)·안산역(3건)·금정역(3건) 등 특정 역이 대상이 되고 있다. 김 팀장은 “지하철역의 침입 루트와 지상 차량 기지의 세부 구조를 서로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달 김 팀장이 붙잡은 라트비아인 H씨의 진술이 원정 그라피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H씨는 한국 경찰이 최초로 체포한 원정 그라피티 범죄의 외국인 용의자다. 그는 지난 1년6개월간 2개월짜리 여행비자로 한국과 본국을 오가며 일곱 차례 그라피티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작품마다 ‘CRUDE’란 태그네임을 남겼다.



 경찰은 범행 동기·수법 등을 캐물었지만 H씨가 묵비권을 행사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김 팀장은 “본인의 범행은 시인해도 동료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 게 그라피티 세계의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H씨는 현재 풀려난 상태다. 법원이 증거불충분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보강수사를 해야죠. 출국금지를 걸어놔 도망갈 순 없어요.”



 경찰은 국내 그라피티 작가들도 범행에 가담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세월호 1주기를 열흘 앞둔 지난 4월 6일 용문 차량사업소에선 ‘SEWOL’이란 그라피티가 그려진 전동차가 발견됐다. 같은 달 15일과 22일 각각 안산역과 검암역에선 그라피티를 그리고 지운 흔적이 발견됐다. 김 팀장은 “완성된 그라피티를 스마트폰 등으로 촬영한 뒤 의도적으로 지운 것으로 본다”며 “태그네임을 통해 정체가 드러날까 봐 그런 것인데 외국인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대 앞에서 홀트레인 정보 공유”=하지만 국내 그라피티 전문가들은 “한국 그라피티 작가들은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홍익대 앞, 압구정 등에 그라피티가 허용된 담벼락이 많은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하철 차량에 무단으로 대형 낙서를 하는 행위는 현행법상 재물손괴(형법 366조)에 해당한다.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여러 명이 가담한 경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처법)에 따라 가중처벌을 받는다.



 20년차 그라피티 작가 ‘닌볼트’(37·본명 지성진)는 “지하철에 그라피티를 그리고 도주하는 행위를 트레인 바밍(Train bombing)이라고 부른다”며 “바밍을 전문적으로 하는 해외 크루들은 사전 답사부터 모의 연습까지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는 조직적 형태를 띤다”고 했다. 1세대 그라피티 작가 ‘레오다브’(37·본명 최성욱)는 “범행에 걸리는 시간은 30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하철 그라피티는 예술성보다 속도를 중시하다 보니 단순하고 고전적인 형태의 올드스쿨(Old School·그라피티 초창기에 유행하던 모양) 스타일을 그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찰이 지난 3월 대구 사월역의 폐쇄회로TV(CCTV)를 확인한 결과 범인들이 현장에 머무른 시간은 20분가량에 불과했다.



 한 그라피티 작가는 “홍대 앞을 중심으로 그라피티 범행 관련 정보가 돌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해외 그라피티 작가들은 발색력과 광택이 뛰어난 독일제 몬타나(Montana) 스프레이를 주로 사용하는데 홍대 앞에 해당 제품을 취급하는 H화방이 있다. 외국어 강사 등으로 신분을 숨긴 이들이 이곳에서 공모자나 조력자를 접촉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급증하고 있는 원정 그라피티를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경찰에 붙잡힌 H씨 일당도 홍대 인근의 한 어린이공원에서 최초로 접선해 차량 기지로 이동했다. 본국으로 도주한 B씨 일당은 H화방에서 그라피티 용품을 사는 모습이 화방 내부 CCTV에 포착됐다.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S BOX] 호주는 역·차고지에 ‘쥐덫’… 뉴욕은 그라피티 용품 소지해도 벌금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의 교통 당국은 최근 일부 지하철역과 차고지에 ‘쥐덫(mousetrap)’이라 불리는 특수장비를 깔아 놨다. 전자 감지센서가 스프레이 페인트에서 나오는 증기를 탐지해 이를 철도 관계자에게 실시간으로 알리는 장비다. 폭증하는 그라피티 낙서 범행을 막기 위한 아이디어다. ‘쥐덫’이라는 별칭은 호주 교통 당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라피티에 애를 먹었는지 보여 준다.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선 2013년 6월부터 1년간 그라피티 범죄가 1만1000여 건 발생했다. 지난달 6일 호주 언론은 “전자 쥐덫 설치비용만 50만 호주달러(약 4억3000만원)가 들었다”며 “쥐덫으로 30여 명의 낙서범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뉴욕은 가장 오랫동안 그라피티와 전쟁을 벌인 도시다. 1960년대 말 뉴욕 브롱스 빈민가의 낙서가 그라피티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하철로 급격히 확산됐다. 통제가 불가능해 80년대엔 아예 그라피티를 허용하기도 했다. 94년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은 ‘깨진 유리창 법칙(broken windows theory)’을 내세우며 그라피티에 강력히 대응했다. 6000대가 넘는 객차를 청소하고 그라피티 용품 소지만으로도 벌금을 물렸다. 더러운 곳은 더 더러워진다는 줄리아니의 원칙은 그라피티를 크게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한국은 어떨까. 지난 4일 경찰청은 “앞으로 그라피티 범죄가 발생할 경우 수사전담팀을 지정하고 본국으로 도주한 외국인에 대해 국제 형사사법 공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국토교통부는 철도안전법을 개정해 철도 기지 무단 침입과 그라피티 범행의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메트로·서울도시철도공사는 역 주변 환풍구의 잠금장치를 강화하고 무인경비시스템도 설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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