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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속으로] 정치로 얼룩진 아베 역사관 전체주의 국가서 가능한 일

중앙일보 2015.06.06 01:09 종합 17면 지면보기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제 샤르티에 교수.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 받는 역사학자다. “학교 역사교육은 사실에 기초해 진보·보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프랑스 고등교육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제 샤르티에(70) 교수가 지난달 방한했다. 그는 20세기 전반 프랑스에서 형성된 역사연구 그룹인 ‘아날학파’의 세계적 권위자다. 프랑스어로 연대기·연보를 뜻하는 ‘아날(Annales)’은 이 학파가 1929년 창간한 학술지(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사회경제사연보) 제목에서 따왔다.

역사학 물길 돌린 ‘아날학파’ 샤르티에 교수



 아날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 ‘○○의 역사’ 같은 제목을 달고 출간된 국내 교양 역사서도 넓게 보면 아날학파의 영향권에 속한다(표정훈 한양대 특임교수). 이념의 시대였던 80년대의 홍역이 수그러지자 역사 분야에서도 정치나 경제의 틀을 넘어 사회문화, 한발 더 나아가 일상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등 교양 역사서 출간 붐의 학문적 병참기지가 바로 아날이다.



 아날학파의 학문적 야심은 훨씬 진지했다. 주로 왕조 교체나 전쟁 같은 굵직한 정치사에 치우쳤던 기존 역사 연구 방법론을 송두리째 폐기했다. 대신 사회 전체를 한 손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려는 총체사를 꿈꿨다(육영수 지음 『책과 독서의 문화사』). 정치외교·사회경제·사상문화사 등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식이다.



 샤르티에는 아날의 4세대 핵심 인물이다. 학파의 적자(嫡子)다. 연세대 사학과 설혜심 교수는 “여러 사람 앞에서 책을 읽는 낭독에서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눈으로 읽는 묵독(默讀)으로 독서의 관습이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해 독서 문화가 개인의 사생활 탄생은 물론 근대 인권 개념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논의로까지 연결되는 다리를 놓은 분”이라고 평가했다. 학자로서 샤르티에의 독창성과 업적에 누구도 토를 달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샤르티에는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원장 윤혜준) 초청으로 방한해 지난달 21, 22일 두 차례 강연했다. 각각 ‘책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은유, 현재의 불확실성’ ‘현재 속의 과거: 시간, 역사, 픽션’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22일 강연을 앞둔 그를 연세대 교정에서 만났다. 책과 역사. 두 강연과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 ‘역사의 위기’에 대해 논한다고 들었다. 현대의 역사학, 왜 위기인가.



 “한 가지 예를 들면 역사소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잘 쓴 역사소설의 경우 역사서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에너지가 넘쳐 마치 역사책을 읽는 것과 비슷한 실제감을 준다. 역사학 연구에 쓰이는 기술적인 방법론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역사의 위기가 거론된 건 80년대부터다. 하지만 이미 70년대에 역사서 기술(記述) 방법이 소설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서사(敍事·narrative) 기법과 다를 게 없다는 공격이 나오기도 했다.”



 - 역사학 연구에 쓰이는 방법론이라면.



 “각종 주석과 참고도서 목록 등 역사서 내용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사용하는 학문적 장치를 소설이 가져다 쓴다.”



 - 그런 소설의 공격에 맞서 역사학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객관적인 과학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고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은 하나의 현상에 대해 복수의 해석(plurality of interpretation)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다르다. 물론 각각의 해석은 일정한 과학적 요건을 갖춰야 한다. 그 요건은 이런 것이다. 우선 모든 과거가 다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먼저 연구 대상을 선정하고 그에 적합한 연구 방법론과 검증 방법 등에 따라 역사 지식이 생산되면 그 지식은 역사학 학문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한다. 역사 지식은 그런 식의 일련의 검증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 복수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가령 일본의 역사 왜곡도 하나의 해석으로 볼 수 있나.



 “검증된 역사적 사실과 역사 해석, 나아가 역사 왜곡은 구분돼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복수일 수는 없다. 사실을 날조하거나 입맛에 맞게 재단하지 못하도록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게 확정돼야 한다. 복수의 해석은 한 현상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자 할 때 쓰이는 개념이다. 가령 히틀러가 어떻게 집권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사회경제적 요인을 중시해 분석할 수도 있고, 당시 독일 사회의 문화적 상황이나 독일 국민의 집단 심리에 무게를 실어 살펴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실의 연결을 달리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한국에서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내용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하다.



 “프랑스도 비슷하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칠 것이냐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진다. 가령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혁명의 입장에서 기성 질서를 파괴한 야만적인 사건이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다. 나는 서로 충돌하는 역사 해석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자기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떤 역사 해석이 더 이데올로기적인지 혹은 덜 과학적인지를 보여줘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역사학에서 해석을 둘러싼 갈등은 불가피한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스럽다. 단일한 역사 해석은 전체주의 국가나 폭력적인 정권 아래서나 가능하다. 다양한 역사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그만큼 민주적임을 뜻한다.”



 샤르티에 교수는 역사 해석의 충돌보다 정치 권력이 역사를 왜곡하는 상황이 더 우려스럽다고 했다. “학자가 되살린 역사적 현실(historical reality)은 곧 정치 권력자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새로운 역사적 현실로 변질시키는 운동장이 돼 버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을 예로 들었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하자 “나는 일본 전문가가 아니다. 그래서 곤혹스럽다”면서도 “지금의 아베 총리는 독일 메르켈 총리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공식적인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베의) 그런 태도는 이전 총리들과는 다른 것”이라며 “일본 정부는 과거 잘못에 대해 낱낱이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또 “현재 일본의 상황은 역사의 진실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자의 역할은 역사적 진실을 확립하는 것뿐 아니라 그 진실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고 말했다.



 - 책에 대해 얘기해 보자. 전자책은 늘고 종이책은 사라진다.



 “미국을 빼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자책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 프랑스나 스페인은 전자책 비중이 전체 도서의 5% 정도다. 문제는 책의 ‘물질성(materiality)’이 달라지면 독서 경험 역시 달라진다는 점이다. 같은 책이라도 전자책으로 읽느냐, 종이책으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가령 전자책 독서는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다. 책 전체에 대한 즉각적인 인식을 얻을 수 없다. 반면 종이책 독서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같다.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동시대 영국 시인 크리스토퍼 말로의 책을 사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책을 담은 형식이 달라도 안에 담긴 내용이 같으면 같은 책이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 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예언은 역사학자가 매우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서툰 분야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뭘 원하느냐다. 누가 어떤 형태의 책을 많이 보느냐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소설책 읽는 것 같은 역사학



뜬금없지만 소설가 김연수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면 그 나라의 소설이나 시집을 읽을 수밖에 없다.”



역사학 역시 과거의 한 시대, 그 시대 사람들의 내면을 샅샅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런 취지에서 출발한 아날학파는 역사학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연세대 설혜심 교수는 “역사학 연구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교과서 같은 방법론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역사 연구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킨 아날의 방법론에 찬성하든 찬성하지 않든 어떤 식의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만큼 기본적인 연구방법으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다만 아날학파는 샤르티에 교수가 속한 4세대 이후 계보를 잇는 연구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한 역사학자는 “아날이 역사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맞지만 지금 아날을 거론하는 것은 흐름에서 뒤처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아날은 80년대까지가 정점이었고, 이후 그 방법론을 그대로 고수하는 학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종합하면 아날의 연구방법론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않지만 더 이상 ‘아날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국내 아날 역사서로는 어떤 게 있을까. 1세대 뤼시앵 페브르가 쓴 『책의 탄생』(돌베게), 2세대 핵심이었던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까치)가 눈에 띈다. 샤르티에의 대표 저서인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지식을만드는지식)과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편집자로 참여한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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