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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붉은광장에서 만나는 평화의 풍경

중앙일보 2015.06.06 00:14 종합 24면 지면보기
김연수
소설가
지난 5월 모스크바의 국영백화점 굼은 구찌·루이비통 등 유명 메이커가 입점한 아케이드를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형해만 남은 도시, 진격하는 소련군, 후방 지원에 나선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을 전시했다. 그 사진의 오른쪽 상단에는 비둘기 그림과 함께 ‘전승 70주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고난의 소비에트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들과 서방의 명품들이 함께 보이는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사진 속의 소련인들을 2015년으로 데려온다면 믿기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굼에서 붉은광장으로 나오면서 100년 전 정부의 체포령을 피해 핀란드로 도피해서는 『국가와 혁명』을 쓰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책에서 국가란 계급 간의 충돌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힘이 세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것이며, 따라서 혁명이 완성되면 국가는 저절로 사멸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레닌의 논지는 이치에 맞았지만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표현하면, 한 번 더 시도할 값어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건 실패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인간의 기획에 지닌 속성에 따른 결과다.



 기획이라는 말을 영어로 옮기면 ‘project’가 된다. 이 단어는 어원상 스크린에 상을 비춘다는 의미의 ‘투사’와 같다. 이 말을 기획이라고 새길 때는 미래를 텅 빈 스크린으로 보고 거기에 현재의 예상을 비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의미상 기획자는 자신이 투사하는 환영이 실재하리라는 것을 믿어야만 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투사가 곧 실재를 창조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때로 ‘창조’라는 말은 끔찍하게 들리기도 한다.



 굼의 맞은편에 있는 레닌묘에서 그 끔찍함을 재차 확인했다. 거기 어둠 속에는 레닌이라기보다는 레닌이 남기고 간 몸뚱어리가 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얼굴을 바라보니 어제 잠든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레닌의 시신을 이렇게 방부 처리해서 보존하는 기획의 이름은 ‘불멸화’였다. 불멸화위원회를 주도한 레오니드 크라신은 1924년 방부 처리한 시체를 보존하기 위한 냉장시스템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 시체의 부패는 계속 진행됐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본 그 평온한 얼굴은, 말하자면 보존된 원래의 얼굴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창조’된 얼굴인 셈이다.



 이 얼굴은 왜 끔찍해졌을까. 어떤 의도에 따라 실제와 다른 것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창조’란 말이 ‘조작’을 뜻한다. 인간이 창조하는 것은 자주 조작된다. 기획이 곧잘 환영을 낳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 과학을 주도한 트로핌 리센코는 창조와 관련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는 “우리 소련에서, 동지들, 인민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신체 조직은 태어나지만 인민으로서의 사람은 창조됩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창조된 인민 중 하나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선언은 그의 연구 성과가 대부분 조작됐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한다.



 며칠 전 소련 시절의 어린이 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차일드 44’를 보면서 시나리오가 너무나 엉성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저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맥락이 잘 연결되지 않는 영화를 보는 것은 꽤 불편했다. 그들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사는 일도 그와 같았다. 시나리오가 너무나 엉성해 맥락이 잘 연결되지 않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스탈린 시절의 소련뿐만 아니라 독재체제의 삶은 대개 그렇다. 누군가가 기획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부자유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누운 몸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5월의 모스크바는 눈부신 신록의 계절이었다. 성바실리 대성당 앞 꽃을 활짝 피운 라일락나무 아래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무명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꺼지지 않는 불 앞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의 눈으로 본다면, 2015년 모스크바는 혼돈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그 혼돈이 내게는 평화의 풍경이었다. 평화란 어떤 기획도 없는 세계 속에서 다채로운 것들이 공존하는 것임을 다시 배운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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