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원래 나이가 … ” 호적 고쳐 정년 늘리는 반퇴세대

중앙일보 2015.06.03 02:15 종합 6면 지면보기
내년 정년퇴직을 앞둔 대기업 직원 A씨(57)는 회사와 ‘정년 연장 소송’을 벌이고 있다. A씨는 지난해 법원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신청을 냈다. 집안 사정상 출생 당시 호적(지금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돼 있어서였다. 법원이 정정을 허가해 A씨의 주민등록번호 앞 두 자리는 ‘57○○○○’에서 ‘58○○○○’로 바뀌었다. A씨는 회사에 “정년퇴직 예정일을 변경된 생년월일에 맞춰 1년 더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회사가 “선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A씨는 고심 끝에 소송을 냈다.

정정한 뒤 직장에 정년소송 잇따라
법무법인 “매달 2~3건 의뢰 들어와”
정년 2년6개월 늘어난 사례도
“일자리 대한 절박함 보여주는 것”

 A씨처럼 생년월일을 정정한 뒤 정년 연장 소송을 벌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주로 정년퇴직을 목전에 둔 5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다. 이들은 “생명 연장의 꿈만큼이나 정년 연장의 꿈도 절박하다. 단 1년이라도 직장을 더 다니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정년 소송을 수임한 법무법인 스카이의 심정구 변호사 사무실엔 매달 유사 사건이 2~3건씩 들어온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에 접수된 정년 연령 정정 사건은 384건. 올해는 4월까지 141건이 접수됐다. 지난해의 3분의 1(128건)을 넘었다.
 

 정년 연장 소송 제기는 50대 중후반 베이버부머(1955~63년 출생자들) 세대에서 두드러진다. 그 시절엔 출생신고를 늦게 해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수력원자력 공사 직원 이모(58)씨도 이런 경우였다. 이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정년확인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24부는 “정년제도의 성격상 정년은 근로자의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실제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이씨 손을 들어줬다. 이씨의 정년은 당초 2013년 9월에서 내년 3월로 2년6개월이 늘어났다.

56년생에서 57년생으로 고친 서울메트로 직원 이모(58)씨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 지난달 5일 서울고법 민사2부에서 “2017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받아냈다. 이 판결이 나온 이후 노동법 전문 변호사 사무실엔 “나도 소송을 하고 싶다”는 50대들의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 교직원인 B씨(60)는 지난해 학교를 상대로 정년확인 소송 끝에 바뀐 생년월일 기간만큼 정년 연장에 성공했다. 그는 지난 2월까지 1년 더 근무했다. 서울 시내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C씨(68)는 2년 소송 끝에 정년퇴직 무효 판결을 받아낸 뒤 급여지급 소송을 벌여 정년 연장이 되지 못해 3년간 받지 못한 급여 등 2억5000여만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베이비부머들이 이처럼 정년 연장을 시도하는 이유는 뭘까. 심정구 변호사는 “경제적 동기가 크겠지만 가장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한 세대로서 퇴직으로 인해 일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이 다른 세대보다 심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현택수(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얼마 전 지방의 한 대학에서도 교수가 생년월일을 정정하고 정년을 2년 연장한 사례가 나와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현 원장은 “길고 지루한 소송과 후배들의 눈총을 감수하면서 정년을 연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에 대한 우리 세대의 열망과 절박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금까지 정년 연장 소송은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게 당연시되는 공무원이나 준공기업 직원, 교사 등 직종에서 많았다. 하지만 60세 정년 의무화(300인 이상 사업장)를 규정한 고령자고용촉진법의 내년 시행을 앞두고 민간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전문인 김성수 변호사는 “민간기업은 정년이 55세인 경우가 많은데 내년부터 5년이 더 늘게 된다”며 “올해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아 있으려는 직원이 많아 기업에서도 비상이 걸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정년 소송이 매번 승소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농협중앙회 직원이었던 D씨(59)는 지난해 정년확인 소송을 냈지만 재판부는 ‘정년은 채용 당시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산정된다’는 회사 측 인사 규정을 들어 패소 판결했다. 한국노총중앙법률원의 장진영 변호사는 “정년 연장 소송이 빈번하다 보니 생년월일을 정정하더라도 정년퇴직일은 바꿔주지 않도록 인사 규정을 개정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