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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극에 빠진 전북의 여름, 열대야는 없다

중앙일보 2015.06.03 01:15 종합 21면 지면보기
전주 전통문화관에서 열리는 ‘천하맹인이 눈을 뜬다’ 공연 장면. 익살스러운 소리와 함께 춤과 연기가 어우러져 늘 관람객이 몰린다. [사진 전주문화재단]


지난달 30일 오후 9시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전통문화관. 고즈넉한 한옥 마당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천하 맹인이 눈을 뜬다’는 마당극 공연이 한창이었다. 왕기석 명창을 비롯해 고소라·최경희 등 소리꾼들은 심봉사와 심청이·뺑덕어멈으로 분장하고 나와 이별과 만남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특히 왕기석 명창이 “어미 잃은 딸 자식을 강보에 싸서 안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동냥젖을 얻어 먹여 겨우 겨우 길러내”라고 노래할 땐 객석에서 긴 한숨소리가 쏟아졌다. 딸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는 모습을 구슬프게 표현한 대목이다.



 신세대 소리꾼 유태평양과 뮤지컬 배우 박나래미가 창작 판소리를 부르며 익살스러운 춤과 연기를 선보일 때는 박장대소가 터지기도 했다. 이날 공연장에는 500여 명이 몰려와 전통문화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서울에서 온 직장인 이중영(43)씨는 “낮에는 한옥과 경기전 등을 둘러보고 밤에는 전통 판소리를 테마로 한 마당 창극까지 감상하니 전주가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게 실감난다”고 말했다.



 ‘예향 전북’은 밤이 즐겁다. 야간 공연과 문화 행사 프로그램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해졌다. 그동안 전북도 내 주요 관광지에서는 밤에 볼 만한 콘텐트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천하 맹인이 눈을 뜬다’는 전주 전통문화관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 8시부터 80분간 펼쳐진다. 지난달 23일 첫 공연을 시작해 10월 17일까지 이어간다. 이 창극은 전주문화재단이 2년 전 시작했다. 매회 400~500명의 관람객이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80~90%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이다. 공연 전에는 떡과 막걸리·찰밥 등 잔칫상까지 푸짐하게 낸다.



 한옥마을 소리문화관에서는 4일부터 11월 20일까지 퓨전국악 ‘한옥 스캔들’을 공연한다. 국악과 타악·비보이가 어우러지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공연이다. 공연은 매주 목·금요일 오후 7시30분부터 열린다. 건물 벽을 스크린 삼아 다양한 영상을 연출하는 미디어 파사드도 체험할 수 있다. 한옥마을 입구에 있는 전동성당에서 ‘빛의 옷을 입다’는 주제로 8월부터 진행한다. 100년 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서 달빛과 한옥·조명이 어우러진다.



 전북도청 야외공연장에서는 오는 9월까지 ‘신 명불허전’ 굿판이 벌어진다. 토요일 오후 7시30분부터 농악·국악극·영화음악과 어쿠스틱 연주 등 메뉴가 푸짐하다. 남원시 광한루원에서는 토요일 밤마다 ‘열녀 춘향’이 무대에 오른다. 고창의 한옥마을 체험관에서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와 그의 제자 진채선 사이의 애절한 사랑을 엮은 ‘도리화 귀경가세’를 지난달 30일 막을 올려 4개월간 공연한다.



 이들 야간 공연은 방문객들이 머무는 ‘체류형 관광지’를 조성하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한옥마을 등에는 연간 7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 오지만 한번 보고 지나가는 ‘경유형 관광지’라는 쓴소리를 들었다. 이지성 전북도 문화관광국장은 “야간 문화 프로그램이 ‘예향 전북’을 알리는 새로운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지역 주민들도 여름밤 무더위를 씻어내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대석 기자 ds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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