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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포볼을 볼넷으로, 일본식 야구 용어 바꾼 ‘전직 홈런왕’

중앙일보 2015.06.03 00:02 강남통신 10면 지면보기
프로야구 원년 해설가 허구연
 
지난 21일 삼성-두산전이 펼쳐지기 전 잠실야구장 중계석에서 허구연을 만났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 개막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야구 해설을 해왔다. [김경록 기자]

한때 잘나가는 야구 선수였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부상을 당했다. 야구를 떠나려 했다. 그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야구 해설가가 필요했다. ‘딱 한 번’만 하며 시작한 중계가 벌써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야구해설가 허구연(64)을 지난달 14, 21일에 만났다. 처음 만난 곳은 그의 사무실이었고, 두 번째 만난 곳은 삼성-두산전이 펼쳐진 잠실야구장이었다.

여덟 살 허구연의 놀이터는 집 근처 부산 구덕운동장이었다. 아버지 손잡고 가서 야구 경기를 봤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대신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대신초는 부산에서도 알아주는 야구 명문이었다. 부산의 모든 초등학교가 참가하는 야구 대회를 앞둔 어느 날, 아침 조회에서 교장이 5~6학년 학급당 한 명씩 뽑아 수업 끝나고 야구 테스트를 받으라고 했다. 대회를 대비해 야구 선수를 더 뽑으려는 거였다. “구연아, 니가 나가 봐라.” 5학년 담임이 또래 중 체격 좋고 다부진 그를 뽑았다. 허구연은 선수가 던져준 공을 잘도 쳐 냈다. “어렸을 때부터 구덕운동장에서 열렸던 웬만한 야구 경기는 다 봤고, 동네에서 ‘찜뽕’ 야구를 쭉 해와서였던 것 같아요.”

 야구선수가 되는 걸 부모님은 반대했다. 감독, 부장교사, 교감, 교장까지 집을 찾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입에서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라”는 말이 떨어졌다. 야구를 시작하자마자 4번 타자를 맡았다.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중학교 입학 앞두고 할머니 댁에 놀러 간 그에게 경남중에서 전보가 왔다. 급히 와보란 내용이었다. 입학 서류가 잘못됐나 싶었다. 알고 보니 야구부에 들어오라는 얘기였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반대했다.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경기고에 입학하는 게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그도 야구는 접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한 달 실랑이 끝에 경남중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게 경남고 야구부로까지 이어졌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주전으로만 뛰었다. 후보 설움을 모르는 선수였다.

아마 야구스타, 대학 두 번 입학한 사연
 
경남중 재학 시절의 허구연. 부상을 입기 전까지 잘 나가는 야구 선수였다.


경남중·고 거쳐 고려대 법대, 대학야구 홈런왕도
공부하는 선수…“사시 합격하고 보란 듯이 운동하고 싶었죠”
실업야구 한일 올스타로 뛰다가 정강이 부상, 선수 생활 접어



고등학교를 졸업 후엔 상업은행 야구팀에 들어갔다. 자기 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1년을 뛰었다. 그런데 그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안 보내주려는 팀과 다투고 71년 고려대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1년 뒤엔 고려대 법학과로 다시 입학했다. 사시·행시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고시 합격해 운동선수도 공부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합격하고 ‘그래도 난 운동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죠.” 71년엔 전국대학야구 홈런왕에 올랐다. 국가대표로도 뽑혔다. 그야말로 거칠 게 없었다.

 대학 마치고 75년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부상을 당한 건 그다음 해 8월, 대전 구장에서 열린 한·일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였다. 주자 1·2루 상황이었다. 타자가 친 공이 3루간 땅볼이 됐고, 유격수가 잡았다. 2루수였던 그는 “3루로 공을 던지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유격수는 그에게 공을 던졌다. 오른쪽 다리를 들고 왼쪽 다리로만 서 있던 상태였다. 몸을 지탱한 왼쪽 다리로 상대편 1루 주자의 스파이크가 파고들었다. 정강이뼈가 두 동강 났다. 다리가 “덜렁덜렁”했다. 구장 출입문이 작아 구급차도 못 들어왔다. 들것에 실려 나간 그는 네 차례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그의 왼쪽 다리에는 20㎝ 길이의 수술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고 오른쪽 다리와 비교하면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굵기가 얇다.

 “부상당한 그날 오전 9시에 동대문운동장에 모여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평상시와 달리 이상하게 잠이 안 오는 거예요. 대전 도착해서도 몸이 좋지 않아 호텔 들어가자마자 냉수 샤워를 했죠. 그래도 너무 지치길래 감독한테 쉬어야겠다고 얘기했어요. ‘네가 제일 잘 치는데 한 번만 더 치고 빼줄게’ 하시더라고요. 섭씨 30도 넘는 날씨 때문에 경기 도중에 멍하게 있다가 다쳐 버렸죠.”

 다음 해 재기했다. “야구장 나온 지 일주일 됐나. 동대문구장 경기에서 갑자기 대타 나가라는 거예요. 딱 쳤는데 홈런성 타구였어요. 당시 김응용 감독이 우스갯소리로 ‘니는 다치기 전보다 더 잘 치네’ 그러더라고요.” 그러나 지금의 프로야구처럼 재활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던 때가 아니었다. 타석에 들어서 공을 칠 때마다 왼쪽 다리에는 힘을 줄 수 없었다. 그게 누적되니 허리가 아팠다. 의사는 더 하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 감독은 더 하라 하고 그는 건강 때문에 안 되겠다 했다. 결국 78년 선수 생활을 접었다.

프로야구 청보 감독직 1년도 안 돼 하차
 
메이저리거가 된 제프 켄트(왼쪽)를 2001년 다시 만났다. [사진 허구연]
그는 병상에 있을 때부터 법학 대학원 준비를 했다. 하루 10시간 책과 씨름하기도 했다. 고려대 법학 대학원에 입학해 81년 학위를 따고는 경기대 교양학부 강사로 일했다. 그런데 다음 해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MBC에서 해설해달라고 연락해 왔다. “전에 아마추어 야구 해설 몇 번 해줬는데 그걸 방송국에서 좋게 봤는지 해달라고 하더군요. 딱 한 번만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방송국의 설득은 계속됐고 야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중계에서 야구의 일본식 용어를 없앴다. 예를 들어 포볼을 볼넷으로, 데드볼을 몸에 맞는 볼 등으로 바꿨다. 지금 사용되는 용어가 그때 바뀐 거다.

 85년 10월엔 프로야구팀 ‘청보 핀토스’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팀은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경험이 부족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 야구 선배였던 코치들을 데리고 팀을 꾸리기 힘들었다. 경기 성적도 좋지 못했다. 1년도 채 안 된 다음 해 8월 그는 감독을 그만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거지. 경험도 없으면서, 감독이 되는 준비를 해야 했는데. 코치 경험을 쌓고 가야 했는데 말이죠.”

 이후 고향팀을 도와달라는 부탁에 롯데 자이언츠에서 2년간 코치 생활을 했다. 90년엔 미국 ‘토론토 블루제이스’ 마이너리그에서 코치로 활약했다. 그의 제자 중엔 미국 내셔널리그 MVP를 지낸 제프 켄트가 있다. 허구연이 만났던 당시 켄트는 아직 마이너리거였다. 타율도 1할6푼 수준이었다. 그는 제프가 공을 칠 때 왼쪽 팔이 들려 나오는 단점을 눈여겨보고 특별 훈련을 해줬다. 이후 타율은 1할 넘게 올랐다. “떠나는 저에게 제프가 고맙다며 메이저리거가 되면 초청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정말로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금테가 둘린 초청장을 보내왔죠. 또 제가 취재 갔을 땐 열 일 마다하고 인터뷰에 응해줬어요.”

“운동하는 애들도 공부 시켜야 합니다”

91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해설을 맡았다. 현대 유니콘스를 포함해 네다섯 개 팀에서 감독으로 일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고사했다. “야구계에 나는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 답이 해설이라고 생각했어요. 감독으로서는 저보다 유능한 사람이 많으니까요. 저는 감독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그는 해설가로 살았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모니터 네 대가 항상 켜져 있다. 그것도 모자라 태블릿PC, 스마트폰으로도 경기를 본다(※식당에서 기자와 낙지 비빔밥을 먹는 중에도 스마트폰으로 야구 경기를 틀어놨다). 국내 프로야구는 물론 미 메이저리그와 일본 경기까지 보기 때문이다. 저녁에 집에 가서도 보통 한 번에 네 개 경기를 동시에 본다. 시즌 중에는 일주일에 한국 프로야구 세 경기, 때때로 메이저리그 한두 경기까지 중계한다. 경기가 있는 날엔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구장에 나가서 감독이며 선수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나름 치열하게 삽니다. 준비 안 하고도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러면 (팬들이) 금방 알아차려요. 그리고 내 양심상 그렇게 준비 안 하면 해설이 안 돼요.” 지금까지 그의 해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냥 경기 중계만 하는 해설가로 끝나면 안 됩니다. 해설하면서 팬들에게 야구를 이해시키고 붐업 시키고 대중화시키고 여기에 부족한 인프라, 선수 수급 같은 한국 야구의 문제점들도 얘기해야 해요. 현장에 있는 감독·선수들은 승리만 생각하지 다른 거 볼 여유가 없거든요. 이게 야구해설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이 장성한 아들(34)은 결혼했다. 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만나 지금은 로스쿨 교수를 하고 있는 아내 사이에서 둔 하나뿐인 자식이다. 아들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야구는 시키지 않았다. “(엘리트 운동) 안 시켰어요. 아들 갖고 ‘도박’할 순 없잖아요. 우리나라 체육 현실은 문제가 있어요. 운동으로 성공하는 비율보다 실패하는 비율이 훨씬 높아요. 운동에서 실패한 애들을 사회 낙오자로 만드는 현 구조는 바뀌어야 해요. 운동하는 아이들도 공부시켜야 합니다.”

 2009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산하 야구발전실행위원장을 맡았다. 아마추어들을 위한 야구장을 세우고 초·중·고 운동부 만드는 일에 뛰어다녔다. 전국 곳곳 지자체장을 만나 직접 설득했다. “대도시만 아니라 산간벽지에도 야구장을 만들어야 더 많은 동호인·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게 국내 야구 저변을 확대하는 일이고요.”


고려대 법학 석사…대학 출강하다 ‘딱 한 번만 해설’이 인생 바꿔
편파 해설? 프로는 스타가 있어야죠, 그걸 키우는 게 제 의무
중계만 하면 안 돼, 부족한 인프라 같은 쓴소리도 해야 돼요


 


“지금 프로야구 인기는 거품이에요”

그의 중계를 보고 편파 방송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몇몇 특정 선수만 편애한다는 거다. 그 소리에 그는 답답해했다. “편파·편애 방송한다. 그거 아니에요. 현재 한국 프로야구 굉장히 위험해요. 스타가 없는데 어떻게 그 종목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요즘 김성근 한화 감독한테 많은 관심이 가 있죠. 좋은 현상이에요. 그런데 젊고 새로운 인물은 어디 가버렸죠. 신상품(신인 선수) 없이 어떻게 (프로야구가) 살아가겠어요. 상품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야구 잘하고 스타성 있고 팀 감독한테 물어봐서 애(선수)가 생활도 모범적이다 그러면 칭찬해주고 부각해주는 거예요.”

30년 넘게 프로야구와 함께했다. 애착이 큰 만큼 우려도 크다. 그는 지방자치단체가 갖고 있는 구장의 운영·광고권을 구단에게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금 구단들 수익 구조가 없어요. 계속 적자죠. 이러면 팬들에게 좋은 시설 제공 못 하고 선수 연봉도 안 올라가요. 스포츠 산업으로 발전이 어려운 거죠.”

 그는 현재 야구계가 자만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의 인기는 거품이라고도 했다. “수도권은 한국에서 인구가 집중된 곳인데도 올해 두산 개막 경기 때도 관중이 꽉 차지 않았어요. 그런 날 정도면 상대팀 말고 두산 팬만으로도 꽉 찼어야 되는데 말이죠. 뉴욕 양키스는 5만 명이 구장 찾으면 98%가 양키스 팬 아닙니까. 적어도 그리 돼야 합니다. 그리 갈라면 한참 멀었잖아요.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전 계속 뛸 겁니다.”

글=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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