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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텔링] 남의 카드 50만원 긁은 ‘봉천동 외상할배’ 수갑 안 찬 이유

중앙일보 2015.05.28 01:29 종합 14면 지면보기
서울 봉천동에는 ‘외상할배’로 불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동네 가게들을 기웃거리는 게 남자의 일상입니다. 나이는 쉰두 살이라고 하는데 할배로 불립니다. 나이에 비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거든요. 목덜미와 머리엔 커다란 흉터까지 있고요.


30년 전 고층 유리창 닦다 추락…목숨 구했지만 지적 장애인으로
주민들 외상으로 먹어도 눈감아줘
주운 카드로 외상값 갚고 술값 결제
경찰·주인 “천천히 갚아라” 용서
할배, 몇주 뒤 2만원 들고 찾아와

 남자는 어딘가 불편해 보입니다. 걸을 땐 항상 길바닥을 쳐다보고, 불안한 듯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립니다.



 “김상호(가명)씨가 지적 장애 2급이라며? 예전엔 그렇게 효자였다던데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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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사람들은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며 상호씨를 각별히 챙겼습니다. 어수룩해도 잘 웃는 그에게 ‘외상할배’라는 애칭도 붙여줬지요. 그런데 이웃 사람들은 왜 그냥 할배가 아니라 외상할배라고 부르게 됐을까요.



 “커피 있어?” 상호씨는 걸음 닿는 대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호프집이나 다방을 발견하면 3000원짜리 커피부터 찾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커피잔을 비운 뒤엔 버릇처럼 주머니에서 백원짜리 동전 몇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지요. 처음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상호씨를 대했던 주인들도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후론 외상을 눈감아줬습니다.



  지난 4월 17일, 동네 공원을 배회하던 상호씨는 벤치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빨간 색상의 신용카드.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던 상호씨는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카드를 주웠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열흘 뒤 등산 바지 주머니에 무심코 찔러 넣은 상호씨의 손에 신용카드의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그제야 카드를 주운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하늘에서 돈이 떨어졌어. 외상값 갚으려고 왔어!” 상호씨는 단골 호프집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주운 카드로 그동안 밀렸던 외상값부터 갚았습니다. 그동안 비싸서 시킬 엄두도 못 냈던 양주도 시켰고요. 그렇게 네 차례에 걸쳐 50만원을 결제했습니다.



 같은 시각, 집에서 잠을 자던 신용카드 주인 김모(45)씨는 요란하게 울리는 문자메시지 알림에 눈을 떴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 50만원이 인출됐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서둘러 경찰에 신고했죠.



 신고를 접수한 낙성대 지구대 송광수 경위는 동료 경찰과 위치 추적 장소로 출동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아? 신용카드를 2시간 넘게 똑같은 장소에서 사용하고 있다니…. 마치 ‘나 잡아가쇼’ 하는 것처럼 말이야.”



 호프집에 도착한 송 경위의 눈에 술을 마시고 있는 상호씨가 보였습니다. 확인해 보니 분실된 신용카드로 술값을 치른 게 확실했습니다. 송 경위는 상호씨를 다그쳤습니다.



 “ 왜 남의 신용카드를 함부로 썼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서 써보고 싶었어. 못 마셔봤던 양주를 마셔보고 외상도 갚으려고 그랬어.”



 상호씨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어눌한 말투로 횡설수설하기만 했죠. 상호씨의 형(56)이 현장에 달려왔습니다. 송 경위에게 상호씨가 30년 전 겪은 일을 들려줬습니다.



 그 시절 상호씨는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도 언젠가 성공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죠. 하지만 상호씨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85년 어느 날, 상호씨는 고층 건물의 유리창을 닦다가 줄이 끊어져 추락했습니다. 머리를 크게 다친 상호씨는 8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인공관을 삽입하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죠. 마을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상호씨의 목덜미 상처는 바로 그때 생긴 겁니다.



 며칠 뒤 딱한 사연을 전해 들은 카드 주인 김씨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호씨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결제한 돈을 천천히 갚아 달라”고 상호씨에게 당부했지요. 봉천동 외상할배의 외상값은 그렇게 조금 더 늘었습니다.



 몇 주 뒤인 5월 초 상호씨는 호프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냈습니다. 손님들이 그를 응시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마운 아저씨한테 돈 갚으려고 왔어.” 꼬깃꼬깃하게 접은 만원짜리 두 장이 테이블 위에 놓였고, 호프집 주인과 손님들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손국희·백민경 기자 9key@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상호씨와 경찰 등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어른을 위한 동화’ 형식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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