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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의 한국인은 왜] 기자 며느리의 5월

중앙일보 2015.05.25 00:47 종합 20면 지면보기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징징거릴 시간에 1초라도 더 놀자는 신조를 가진 터라 아침 틈틈이 집안일을 한다. 오늘도 베이킹소다로 가스레인지 묵은 때를 나름 가열차게 벗기고 밀린 빨래를 완수하고 보람차게 출근했다. 잠깐, 일도 살림도 완벽히 처리하는 존재로 보인다면 심각한 사실 왜곡이다. ‘집안일에선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쓰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살림만 한다’고 읽는 나이기 때문이다.



 ‘살림 미니멀리스트’라고 고백하고 나니 남편을 집안일을 돕지 않는 구시대 남자로 만든 것 같지만 이 또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임경선 작가가 신간 『태도에 관하여』에서 “평등의 모습이 항상 5대 5일 필요는 없다”고 설파했듯 가정마다 나름의 평등상이 있다. 애시당초 집안일을 ‘돕는다’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일도 같이 하면 살림도 나름의 방식으로 분배하는 게 맞다. ‘돕는다’가 아니라 ‘나눈다’가 맞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부족한 며느리를 응원해주시는 시어머님께 송구해진다. 별미 갓김치부터 요구르트까지 챙겨 보내주시는 시어머니 덕에 아파트 관리실에서 내 별명은 ‘택배 챔피언’이다. 반면 난 참 못난 며느리다. 일이 좋다는 핑계로 가정의 달 5월의 어린이날엔 “아이 낳아야 하는데”로 초조했고, 어버이날엔 지방 시댁에 못 가서 착잡했다. 비단 기자 며느리뿐이랴. 회사원·사업가·외교관 며느리도 매한가지일 터다.



 그러다 데이비드 골드버그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코끝이 시큰해진다면 양성평등에 관심이 많은 분일 터다. 페이스북 CEO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인 그는 이달 초 사고로 47세를 일기로 급서했다. 자신도 실리콘밸리의 실력자지만 “외조 열심히 했다”는 게 자랑인 ‘21세기형 남편’이었다. 레베카 솔닛이 뉴욕타임스도 절찬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밝혔듯 “여성이 경력을 갖고자 하는 건 일종의 ‘병’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골드버그의 존재는 모든 일하는 여성의 희망이었다.



 샌드버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페이스북 커버 사진을 결혼식 장면으로 바꾸고 닷새 만에 복귀하며 여장부임을 재입증했다. 솔직히 난 샌드버그가 못된다. 일본 드라마 ‘대단한 곳으로 시집와 버렸네!’의 ‘기자 며느리’ 주인공 기미코에 가깝다. 아침엔 남편의 돌돌 말린 양말 옆에 처박힌 스타킹을 겨우 찾아 신는 기미코. 그보다 내가 나은 게 하나 있다면 시어머니 복(福)이다. 며느리 바이라인이 보이면 꼭 문자를 주시는 시어머니. 이런 멋진 가족에게 좋은 글로 보답하는 것도 21세기형 직장인 며느리들의 사명 아닐까.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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