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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국가가 갖출 예의

중앙일보 2015.05.19 09:27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어제는 5월 18일이었다. 3년 전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장판사로 승진하며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 형사 재판장을 맡게 되었다. 미제 사건을 체크하다보니 5·18 관련 재심 사건들이 있었다. 당시 이미 전국적으로 여러 건의 5·18 재심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대법원에서 확정된 상태였다. 5·18 특별법도 제정되어 있고 대법원의 결론도 이미 확립되어 있어서 사건 기록만 검찰에서 송부되어 오면 검토 후 곧바로 무죄를 선고하고 검찰도 항소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광주에 재심이 개시되고도 1년이 넘도록 아무 진행도 되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재심 대상인 사건 기록이 이를 보관하고 있는 검찰에서 아직 송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판 검사를 통해 조속히 기록을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30년 전 기록이라 찾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두세 달이 지났다. 이번에는 조속히 기록을 찾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정식으로 발송했다. 찾고 있다는 답만 돌아온 채 또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렀다. 생각 끝에 기록 찾는 일을 하고 있는 검찰측 실무자를 수소문하여 직접 통화했다. 옛날 기록들이 사건번호 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일일이 기록 무더기를 뒤져서 찾는 중이란다. 힘들겠지만 재심을 신청하고 하염 없이 기다리고 있는 분들의 심정을 헤아려 조금만 더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달여가 더 흐른 후, 드디어 기록들이 도착했다. 실무자분이 연일 야근해 가며 먼지 쌓인 기록 창고를 뒤지고 뒤진 결과였다. 곧바로 재판을 열어 무죄를 선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건이 고민이었다. 5·18 이틀 전까지 대학 총학생회장으로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 및 시위를 주도했다는 공소사실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진행 중에 옥중 사망한 분의 재심 사건이었다. 고인의 88세 부친이 신청한 사건이다. 문제는 항소심 진행 중에 피고인이 사망하여 공소기각 결정이 있으면 1심 판결의 효력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법상 유죄의 확정판결이 있는 경우에만 재심을 개시하도록 되어 있어 이 사건은 재심 대상 자체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 기각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부가 함께 고민한 끝에 결정문 이유 전반부는 다른 재심사건 판결들과 동일하게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이 부분에 관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단은 확립되어 있다.



“전두환 등이 1979. 12. 12. 군사반란 이후 1980. 5. 17. 비상계엄 확대 선포를 시작으로 1981. 1. 24.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행한 일련의 행위는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범죄로서 형법상 내란죄에 해당하므로(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피고인의 위 공소사실 기재와 같은 행위는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파괴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로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라고 할 것이어서,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일응 범죄가 되지 아니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에 의하여 무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어서 결정문 후반부에 내용적으로는 이처럼 무죄에 해당하지만 법률상 이러이러한 절차적 이유로 기각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기각결정문은 판결처럼 법정에서 선고하는 것도 아니고 우편으로 보내게 되어 있다. 고민해서 쓰기는 했으나 법조인 아니고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운 소리에 불과했다. 직원을 통해 설명드리도록 할까 생각하다가, 결국 재판장인 내가 직접 유족들께 전화하여 내용을 설명드렸다. 최대한 상세히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자괴감이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었다. 이런다고 유족분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리가 있겠는가.



이런 조치들이 부적절했다고 비난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몇 줄짜리 형식적인 기각결정문을 작성하여 우편으로 보내고 마는 것이 법 규정대로의 처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국가가 갖출 예의 말이다.



문유석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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