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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그땐 왜 그랬지’ 과거는 곱씹을수록 불행해진다

중앙일보 2015.05.19 03:39 강남통신 8면 지면보기
01 현재가 힘드니까 자꾸 옛 생각


옛날 얘기 들먹이는 이모가 불편한 30대 여성

Q (가족 간 갈등에 지친 주부)
두 딸의 엄마입니다. 마흔을 앞둔 제 고민은 이모의 공치사 때문에 가족들 사이에, 특히 어머니와 이모 사이에 생기는 갈등입니다. 제가 어릴 때 미혼이던 이모가 공책을 사주신 적이 있었답니다. 물론 전 기억이 잘 나질 않고요. 그런데 이모는 30년 전에 사준 공책 얘기를 지금까지도 하십니다. 돈 빌려준 얘기도 꺼내시는데 어머니가 이자를 주지 않고 원금만 갚았다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지금 이모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얘기를 자꾸 꺼내시니 두 분 감정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옛날 저희 집의 형편이 아주 어려워서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못했던 걸 이모가 많이 서운해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학교 다닐 때 용돈 몇 번 받은 게 전부인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자꾸 옛이야기를 꺼내시는 걸까요.



A (‘과거는 묻지 마세요’ 윤 교수) 오늘 사연의 주제는 과거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이모 때문에 생긴 가족 갈등이네요.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힘들게 합니다.



 과거 기억이라는 게 감정 상태에 따라 새로운 색깔로 덧입혀지고 때에 따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롭게 편집되면서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기억으로 재생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수많은 기억 중에 몇 가지에만 꽂혀 내 기억의 대부분을 그 녀석이 차지하기도 하지요. 제 외래 환자 중엔 남편에 대해 섭섭하게 느꼈던 한 가지 사건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언제 이야기냐고 물으니 40년 전 일이라고 답하시더군요. 사실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아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현재와 미래를 행복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은 현재에 영향을 받습니다. 미래 역시 앞날의 현재이고요. 즉 우리가 지금 사는 현재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을수록 과거도 예쁘게 채색되고 그래서 현재가 더 좋아지는 겁니다.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니 결국 미래도 행복할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이죠.



 우울장애의 주된 증상이 과거에 안 좋았던 일이 자꾸 생각나고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우울증까진 아니더라도 과거의 섭섭함을 많이 표현한다는 건 현재에서 행복감을 잘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문제가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02 아름다운 기억이 행복한 현재 만든다



Q
그러고 보니 이모의 얼굴이 어둡고 우울해 보일 때 과거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더 꺼내는 것 같습니다. 과거 이야기로 엄마와 이모 사이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말다툼이 일어나려고 할 때면 제가 나서서라도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저도 속상하고 지치게 됩니다. 그래서 위로받고 싶어 남편에게 하소연하는데 남편이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면 참 섭섭하더라고요. 그럴 때면 과거에 남편 때문에 속상했던 일들이 마구 생각나더군요. 결국 부부싸움까지 가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긍정적으로 만들 방법이 있을까요.



A 괴로웠던 과거 기억을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유행입니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채널에서 ‘과거사 토크’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경쟁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괴로웠던 기억을 꺼내는 건 기억 회복을 통한 힐링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 회복을 통한 힐링 효과란 ‘부정적인 기억은 뇌의 깊은 곳에 억압되어 저장되어 있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순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 억눌린 기억을 꺼내놓고 이야기할 때 자유로워질 수 있고 마음에 힐링이 온다’는 내용입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의 부정적인 일에 집착하는 기억 회복 프로그램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해석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마저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재구성하니까요. 해외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성 관계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기억 회복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이성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렸을 때 아빠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거란 추론하에 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따뜻하게 자기를 대해 주었던 아빠의 기억이 머리에 저장되어 있었던 그녀가 부정적인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식탁에서 자신에겐 야단을 쳤던 아빠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의 모습까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억을 증거로 딸이 아빠를 아동학대로 고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죠. 나중에 주변 사람을 통해 그 기억의 진실 여부를 가려 보니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으로 과거 기억이 재구성된 것이죠. 특정 치료 상황에선 부정적인 기억을 회복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일반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과거를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데 더 효과적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것 같지만 우리가 느끼고 인지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내 입을 떠난 말이 상대방의 청각 신경을 통해 뇌에서 해석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시각 신경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죠.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재의 이 시간도 조금 전 과거의 사건이고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게 재구성되어 축적될 때 내 삶과 인생이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남 보기에 훌륭한 과거의 내용을 가졌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인생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과학 측면에서 가치 있는 삶이 행복이고 진실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진실은 리얼리티 자체가 아닌 과거에 대한 태도에 의존합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실연당하면 분노가 생깁니다. 그리고 분석하게 됩니다.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 누가 덜 잘못했는지, 그 사람이 날 정말 사랑하기는 했는지,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기는 했는지. 그러나 이성적 분석은 과거를 부정적으로 재구성하기 일쑤입니다. 인생 대부분의 내용이 절대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섞여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 사람 잘못도 있고 내 잘못도 있고, 정말 사랑했던 부분도 있고 서로 이용했던 부분도 있고, 정도의 차이일 뿐 서로 섞여 있죠. 그 연인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보다는 그 연인의 어떤 부분에 내가 끌려 만났을까라는 질문이 좋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행복한 과거의 경험을 갖게 되는 거니까요.



 긍정적 과거 만들기를 촉진하는 방법은 과거에 행복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과 만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내가 자랐던 곳을 찾아 좋은 추억을 되새기며 걸어 보는 겁니다. 오래 보지 못했던 친구와 만나 과거 철없이 놀았던 재미있었던 추억의 과거를 함께 회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냉정한 분석이 아닌 따뜻한 과거와의 만남에 내 인생이 행복하게 바뀌어 갑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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