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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고가 공원’ 만들 때 벤치 수까지 시민에게 물었다

중앙일보 2015.05.19 01:32 종합 10면 지면보기
1999년 8월 미국 뉴욕 맨하튼 첼시에 위치한 건물 펜사우스(Penn South)에서 주민 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80년부터 방치된 폐철로 ‘하이라인’ 철거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조슈아 데이비드(51)와 로버트 해먼드(45)는 이때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부동산 개발업자와 토지주들이 주도하는 ‘전면 철거 후 대규모 개발’을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하이라인은 충분히 보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2000년 시민단체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을 결성했다.


‘걷는 도시’ 서울 ② 보행도시의 조건
‘폐쇄 철로’ 공원화 성공한 도시들
파리, 반대 주민 설득에 17년 걸려
소상인에게 고가밑 임대 주고 절충

 두 사람은 ‘낙후 지역의 폐철로’란 이미지를 걷어내고 하이라인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새로운 방식의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당시 하이라인을 소유하고 있던 운송회사 CSX를 끈질기게 설득해 고가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두 사람은 사진작가 조엘 스턴펠드와 함께 고가의 사계절을 담은 ‘하이라인을 걸으며’라는 사진집을 2001년에 펴냈다. 맨해튼의 고층 빌딩으로 수놓아진 뉴욕의 스카이라인, 하이라인과 함께 흐르는 허드슨강, 우거진 맨해튼의 식물들…. 뉴욕의 개성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하이라인의 보존 가치를 웅변했다. 뉴욕타임스 등 유력 언론이 하이라인 보존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영화 ‘헐크’의 에드워드 노튼 등 유명 배우들이 하이라인을 찾았다. 노튼은 ‘하이라인 친구들’ 모금회 장을 맡았다. 모금회는 이후 4400만 달러(477억원)를 모았다. 전체 공사비(1억5200달러)의 29%에 이르는 액수였다. 이 돈은 하이라인에 대한 시민의 공감과 참여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부각됐고, 시 의회가 예산 의결을 하게 된 가장 큰 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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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아 데이비드 ‘하이라인의 친구들’ 대표는 지난 13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철거 논쟁부터 공원화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뉴요커들의 관심 덕분이었다”며 “시민 공감대 형성을 최우선 가치로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는 2003년 진행된 아이디어 공모전도 시민 공감과 참여를 잘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했다.



 하이라인파크의 모델인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도 시민 참여와 공감대 형성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프롬나드는 옛 고가 철길을 따라 조성된 4.5㎞ 길이의 산책길로 하이라인과 매우 비슷한 형태다. 프롬나드를 설계한 건축가 자크 베르젤리(77)는 지난달 8일 기자와 인터뷰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며 “고가 공원에 벤치를 몇 개 둘 것인지를 결정할 때도 시민들의 의견을 일일이 물었다”고 했다.



 프롬나드 조성을 놓고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고가 밑에 점술사와 노숙인이 몰려 우범지대가 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이에 사업 주체인 파리동부개발공사 는 고가 하부 공간을 소상공인들에게 25년간 임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단기적인 사업 이익을 거스르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논란이 거듭됐지만 고가 주변의 상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롬나드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는 ‘예술의 다리 ’는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파리와 뉴욕의 프로젝트는 오랜 협의 과정을 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롬나드는 83년 공원화 계획이 수립되고 최종 완공되기까지 17년이 걸렸다. 하이라인 파크는 하이라인의 친구들이 결성된 후 14년이 소요됐다. 2014년 사업 발표 후 3년 만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이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민현식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해도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소수의 사람들을 충분히 배려하고, 그들이 수긍할 때까지 성심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도시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물류(차량) 중심에서 장소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공감과 참여의 부족 등 절차상의 문제점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98년 명동·인사동의 ‘차 없는 거리’부터 서울광장 조성, 청계천 복원을 거치며 이미 보행 도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왔다는 의견도 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고가 공원화는 전임 시장들로부터 시작된 보행 공간 확대와 맥을 같이한다”고 했다.



◆특별취재팀=강인식·강기헌·장혁진·김나한 기자 kang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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