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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규제 칼날 피해가는 월가의 흡혈귀들

중앙일보 2015.05.19 00:05 종합 33면 지면보기
폴 크루그먼
칼럼니스트
내가 ‘흡혈귀’라 부르는 월가의 금융업체들은 지난해 돈으로 연방의회를 손아귀에 넣었다. 예전엔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양분됐던 월가가 요즘은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응원하고 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의 다수당으로 등극한 공화당은 월가의 총애에 보답하기 위해 2010년 통과된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을 없애려 하고 있다.



 왜 월가는 도드-프랭크법을 없애려 애쓰는가. 한마디로 이 법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은 고삐 없이 날뛰어온 미국의 금융자본을 제어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솜방망이에 불과하다고 믿어온 진보주의자들에겐 놀라운 얘기일 것이다.



 사실 이 법의 힘은 미국 금융을 개혁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 수준에도 못 미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험 개혁(오바마케어)처럼 분명한 승리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월가가 이 법을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진보주의자인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이 법에 근거해 만든 소비자금융보호국은 월가의 마구잡이 대출 관행에 확실한 제동을 걸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주 원인이었던 파생상품을 보다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금융의 투명성이 제고되고, 중개기관의 수익이 감소했다는 증거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대마불사(Too big to fail)’란 표현대로 지나치게 비대화된 월가 금융업체들은 어떻게 됐나? 여기서도 도드-프랭크법은 개혁파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과를 이뤄냈다. ‘대마불사’란 표현은 문제의 핵심을 짚지 못한다. 미국 금융의 치명적 문제는 거대한 규모를 지닌 금융기관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생겨났다. 은행과 헤지펀드·보험사가 마구잡이로 잡종교배되면서 무시무시한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 거대한 복합괴물체는 미 금융의 구조적 복잡성을 이용해 정부의 칼날을 피해갔다. 투자를 잘못한 결과 도산돼야 할 처지가 됐음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구제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월가의 금융인들이 모럴 해저드를 이어갔기에 미국은 재앙을 맞게 됐다.



 이에 맞서 나온 도드-프랭크법은 ‘구조적으로 중요하다’고 지정된 금융업체들에 규제의 칼날을 빼들었다. 금융업체가 위기를 맞으면 묻지마식 구제금융 대신 당국이 경영권을 통제해 위기를 해결한다. 이어 문제의 금융업체가 더 많은 준비금을 쌓도록 강제한다. 무모한 투자를 막아 파산 가능성을 줄인 것이다. 이런 조치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월가의 방만한 경영엔 재갈이 물려졌다. 당장 묻지마식 투자를 하면서 당국의 규제를 요리조리 피해가는 ‘그림자금융(shadow banking)’ 행태가 많이 줄어들었다. 제너럴 일렉트릭처럼 본업인 제조업 대신 금융으로 손을 뻗었다가 도드-프랭크법을 의식해 원래 전공으로 돌아가는 기업도 생겼다. 당국의 엄격한 규제하에 투자를 조절하는 전통적 개념의 금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규제를 피하기가 과거만큼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다고 가만 있을 월가가 아니다. 금융업체들-흡혈귀들-이 반격에 나섰다. 이들이 단순히 경제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라고 흡혈귀란 표현을 쓴 건 아니다. 물론 흡혈귀가 피를 빨아먹는 건 사실이다. 규모가 비대하고 능력에 비해 과다한 이득을 챙기는 월가 업체들이 미국의 경제를 해친다는 증거는 많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도 인정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월가의 금융업체들을 흡혈귀라 부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들은 미 국민 대다수가 환영하는 밝은 햇살(개혁)에 대놓고 반항하는 대신,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개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요즘 월가에서 “규제 없던 시절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금융업체는 찾기 힘들다. 월가의 후원을 받는 우익 싱크탱크들도 마찬가지다. “규제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고 목소리를 높여온 ‘아메리칸 액션포럼’조차 최근 낸 보고서에서 자신감을 잃고 기존 주장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신 월가의 흡혈귀들은 “개혁하면 악당들만 신나는 세상이 된다”는 주장을 들고나왔다. ‘대마불사’였던 대형 금융업체들을 규제하면 투기성이 훨씬 강한 ‘떴다방’식 금융업자들만 유리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흡혈귀들이 이런 주장을 펴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국의 규제로 투자 대비 수익이 급감하자 자신들을 옥죄는 규제의 핵심인 ‘구조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 지정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월가의 집중 로비를 받은 공화당은 도드-프랭크법의 폐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워런 의원 같은 개혁파들이 이 법의 폐기 움직임 뒤에 숨은 월가의 존재를 밝혀낼 경우 자신들에게 쏟아질 여론의 뭇매를 두려워한다. 도드-프랭크법이 살아있는 지금도 미국의 금융은 불안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규제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과거보다는 낫지만 도드-프랭크법엔 진짜 개혁에 필요한 핵심 조치가 많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속에 숨은 월가의 흡혈귀들은 이 법을 없앨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폴 크루그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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