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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월요일] 촌스러워서 끌리네, 옛 간판 옛 글씨

중앙일보 2015.05.18 01:39 종합 23면 지면보기
페이스북 ‘간판수집가’에 올라온 전국의 이색 간판들. 간판 제작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다양한 글씨와 함께 익살스러운 재치와 서민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사진 간판수집가 페이스북]


홍성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서체로 재탄생한 옛날 간판
디지털 인쇄 없던 시절의 간판들
간판쟁이가 직접 써서 개성 만점
B급 문화·복고 유행 맞물려 재조명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다. 시의 내용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아름다운 게 또 있다. 옛날 간판이다. 삼거리정육점, 현대문구과학사, 삐삐슈퍼, 송옥여관 등 옛날 간판은 상호부터가 오래된 골목에서 마주칠 법한 정겨움을 주지만 자세히 보면 글자 자체로도 아름다운 매력을 풍긴다. 디지털 인쇄가 없던 시절 ‘간판쟁이(표준말은 간판장이)’라 불리던 이들이 붓으로 칠하거나 모눈종이에 디자인한 글씨를 시트지에 오려 붙여 만든 결과물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 간판은 만든 이의 필체와 개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하나의 ‘작품’에 다름없다.



 이런 옛날 간판을 수집하는 ‘간판 수집가’가 늘고 있다. 오래된 정감이 묻어나는 간판, 기발한 재치로 웃음을 주는 간판, 독특한 글씨체와 그림으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간판을 모으거나 사진을 찍어 보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간판은 저작권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임자인 무형자산이다. 이런 옛 간판에 쓰인 글씨체를 본떠 서체(폰트)를 개발하거나 디자인에 활용해 유형자산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간판 수집가들은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 불릴 법하다.



광주광역시 양림동의 한 입간판(왼쪽)에 사용된 서체의 특징을 뽑아내 디자인용 서체로 개발한 ‘구판장체’(위). [사진 홍단]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홍단’은 옛 간판들을 수집한 뒤 서체의 특징을 끄집어내 새로운 서체를 개발한다. 이렇게 개발한 서체는 달력이나 포스터, 표지 디자인 등에 활용한다. 홍단의 반윤정 아트디렉터는 2004년 청계천 일대의 간판들이 모두 획일화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과연 이것이 아름다운 것인가’라는 회의를 품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성북동에 있는 ‘백옥 피아노’ 간판이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나무 판 위에 붓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극장의 포스터처럼 글자마다 그림자 처리를 한 것이 특징이었다. 간판의 글씨를 쓰는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예술가란 생각을 품은 그는 이때부터 전국에 있는 간판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활용해 의미 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옛 간판을 새로운 글씨체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0년 서울 용두동의 ‘효성기계’라는 글씨를 새가 눈길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긴 듯한 형상의 글씨로 전환한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이를 정호승 시인의 ‘눈길’이라는 시에 적용한 뒤 ‘눈길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앗간 간판에서 영감을 받은 방앗간체와, 미용실 간판의 ‘ㅇ’과 ‘ㄹ’에 있는 동그란 돌기 모양에서 착안해 만든 용체 등이 이렇게 탄생했다.



간판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배달의민족한나체’를 적용한 USB 디자인. [사진 우아한형제들]
 최근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 등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고인 ‘다들 식사는 하셨습니까’란 서체 역시 옛날 간판에서 영감을 받았다. 배달 앱인 ‘배달의 민족’을 만든 ‘우아한 형제들’이란 회사의 글씨체다. 그 전까지 회사는 디자인 회사가 만들어준 서체를 비싼 이용료를 내고 사용하고 있었다. 필요한 곳에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자체 폰트 개발이 절실했다. 이때 모티프로 삼은 것이 옛 간판들이다. 이곳 금재현 디자인실장은 “옛 간판에서 볼 수 있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 있는 특성이 B급 문화와 패러디 문화를 지향하는 회사의 이미지와 잘 맞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아크릴 위에 시트지를 오려 붙인 딱딱한 글씨체의 옛 간판들은 ‘배달의민족한나체’로, 붓글씨로 그려 넣은 부드러운 서체의 간판들은 ‘배달의민족주아체’로 재탄생했다. 무료로 배포된 이 글씨는 방송 프로그램의 자막이나 웹툰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정체성과 기업 문화를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페이스북에서 ‘간판수집가’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000간(공공공간)’의 홍성재 대표는 취미로 시작했던 간판 수집이 회사의 디자인 프로젝트로 연결된 경우다. 홍 대표는 지난해 말부터 페이스북에 자신이 수집한 이색 간판 사진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그가 수집한 간판에 호응을 보이면서 자신도 수집한 간판 사진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현재는 13명의 편집자가 전국에 있는 간판 사진을 수집해 공유한다. 홍 대표는 “재미있고 기발하며, 서민의 향기가 있고, 세련되기보다는 기존의 틀과는 다른 의외성이 있는 간판이 주요 수집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가게에 이름을 달아준다는 건 가게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현대자동차그룹과 함께하는 ‘거리의 이름들’이란 프로젝트로 연결됐고, 현재 서울 창신동 봉제 공장 52곳이 그의 손때를 입은 간판을 무료로 달게 됐다.



방앗간 간판으로 만든 ‘방앗간체(위)’와 미용실 간판으로 만든 ‘용체(아래)’. [사진 홍단]
 간판 수집가들은 옛 간판의 매력으로 의외성과 독창성을 꼽는다. 반윤정 아트디렉터는 “글씨는 이미지와는 달리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즉각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메시지 전달력이 가장 큰 디자인 요소”라며 “옛 간판은 글씨의 삐침이나 꼬리 모양 하나에도 만든 이의 개성과 에너지가 담겨 있어 새로운 폰트를 디자인하는 데 풍부한 영감을 준다”고 설명했다. 홍 대표 역시 “손으로 한다는 건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만든 이 고유의 습성이 전달되기 때문에 개별적이고 틀에 박히지 않은 의외성이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디자이너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는 옛 간판들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010년 서울시 근현대생활유산수집팀에서 청진동 일대의 간판을 수집했던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사람의 이름도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이름이 다르듯, 가게의 이름인 간판 역시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적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며 “가게 이름에 얽힌 사연만으로도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기 때문에 복고풍의 유행과 함께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이가 삐뚤삐뚤 쓴 일기장 버리지 마세요 … 디자인 보물 될 수도



‘나’ ‘너’ ‘우리 가족’…. 이런 글씨들을 삐뚤삐뚤하게 쓴 아이의 받아쓰기 공책이나 그림과 함께 글씨를 써둔 그림일기 등을 함부로 버리지 말 일이다. 이런 글씨체도 디자이너의 손끝을 거치면 의미 있는 디자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홍단’의 반윤정 아트디렉터는 한 회사 직원의 동생이 보관하고 있던 받아쓰기 공책에서 영감을 받은 폰트를 개발했다. 그는 이 글씨체에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대성구판장 입간판에서 발견한 서체의 특징을 접목했다. 대성구판장의 글씨는 초성과 종성을 일렬로 배열한 것이 독특하다. 이런 글씨가 초성-중성-종성의 균형을 지키기 힘든 아이들의 글씨와 유사한 데 착안해 둘을 결합한 ‘구판장체’라는 글씨가 나왔다.



 초등학교 아이의 글씨처럼 의식하지 않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디자인한 것이 더 큰 미적 효과를 주는 현상을 전문용어로는 버나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비전문가의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버나큘러는 사투리·방언을 뜻하는 말로 매끈하게 다듬거나 틀에 얽매이지 않은 것을 뜻한다. 배달 앱인 ‘배달의 민족’의 글씨체도 이런 버나큘러 디자인이 주는 효과를 겨냥해 개발됐다. 이를 위해 회사는 당시 인턴이던 태주희 디자이너에게 서체 개발을 일임했다. 태 디자이너는 서체 디자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모눈종이에 손으로 글씨를 써가며 지금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 결과 ‘ㅅ’의 경우 양쪽의 두께와 기울기가 다르고, 초성으로 쓰일 경우와 종성으로 쓰일 경우 끝 모양이 달라지는 형태의 글씨체(한나체)가 나왔다. 기성 디자이너의 도움이나 수정도 배제됐다. 태 디자이너는 “기성 디자이너들이 관여하면 정갈하고 깔끔할 수는 있지만 비전문가의 어설픈 느낌과 무언가 삐뚤어진 데서 오는 독특한 감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별생각 없이 보던 광고 글씨에도 ‘완벽하고 정갈한 것보단 무언가 어설프고 어긋나 보이는 것이 시선을 붙잡는다’는 고도의 전략이 깔려 있는 셈이다.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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