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덩치만 큰 ‘사춘기 도시’ 서울, 머물고 싶은 ‘성숙한 도시’로

중앙일보 2015.05.12 01:06 종합 16면 지면보기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왼쪽)와 정수복 사회학자(가운데),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대표가 서울 서소문공원 인근 녹지에서 ‘걷는 도시 서울’의 비전과 과제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최근 20년간 서울 도심공간은 ‘차도를 없애고 걷는 공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1998년 명동·인사동의 ‘차 없는 거리’를 시작으로 서울광장·광화문광장·숭례문광장이 조성됐고, 청계고가는 철거되고 대신 청계천이 복원됐다. 전임 시장들과 마찬가지로 박원순 서울시장도 보행공간 확대를 내걸고 ‘서울역고가 공원화’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차도와 철도로 끊긴 보행로와 한양도성을 잇기 위한 것”이라며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walkable urbanism)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남대문시장 상인과 봉제공장 측은 “시장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생계도로를 없애려 한다”고 반대하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시는 차량을 통제하고 고가를 시민에게 개방했다. 4만8000명이 몰렸다. 하지만 찬성과 반대 주장이 부딪치기도 했다. 시민의 참여와 공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본지는 ‘걷는 도시’와 서울역고가 공원화를 논의하기 위한 대담을 마련했다.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이로재 대표),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대표, 정수복(사회학자·작가) 박사가 참여했다.

‘걷는 도시’ 서울 ① 왜 보행도시인가
승효상·조민석·정수복 3인 대담





 -승효상=“서울역고가 공원화를 계기로 ‘걷는 도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도시는 두 번의 큰 변화를 겪습니다. 특권계층을 의미하는 ‘부르주아’의 어원은 성(城)에서 비롯됐죠. 산업화와 민주화로 성(계급)이 무너지면서 도시가 급격히 커지고요. 이동 시간을 줄여준 자동차는 도시 팽창을 가능케 합니다. 하지만 기계 중심의 도시에 대한 회의도 커집니다. 21세기 들어 도시의 팽창이 멈추면서 사람들이 환경과 건강을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IT혁명으로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하죠. 이젠 자동차가 많은 도시가 아니라, 걷기 좋은 도시가 부각되고 있어요.”



 -정수복=“이탈리아·스페인의 몇몇 도시는 아예 구도심의 차량 통행을 막고 순환 전차만 다니게 하죠. 구도심 전체가 보행전용공간이 되는 겁니다. 영국과 독일에선 도로를 줄이고, 예를 들어 왕복 4차로를 2차로로 줄인다든지요.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조민석=“서울은 최근 100년간 인구가 50배 늘었죠. 첫 50년간 5배 늘고, 그다음 50년간(산업화 시기) 10배 늘었어요. 그런데 이젠 정체기를 맞이했어요. 지금 서울은요, 대도시의 성숙단계로 보면 덩치만 큰 ‘사춘기 도시’입니다. 지금까지는 성장호르몬이 필요했어요. 도로가 호르몬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죠. 육체적 성장이 끝난 뒤엔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합니다. 지금 서울엔 변화가 필요합니다.”



 대담자들은 ‘팽창 위주의 도시가 질적 성장기를 맞이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걷는 도시’를 계속 언급했다. 도시공간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들은 왜 ‘도시의 성숙’과 ‘걷는 도시’를 등치시키는 걸까. ‘걷는다’는 건 도시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승=“과거엔 자동차로 시간을 단축하는 게 목표였죠. 지금은 공간을 세세히 경험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일로 부각되고 있어요. 요즘 뜨는 동네를 보세요.”



 이와 일맥상통하는 발언이 있다. 최근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는 “요즘은 유럽 일주와 같은 일주여행이 사라지고 파리 체험, 런던 뒷골목 체험, 도쿄 공방 투어 같은 매우 디테일한 여행이 뜨고 있다. 이는 도시 가치의 변화와 밀접히 연결된다”고 말했다.



 -조= “뉴욕은 2010년 ‘액티브 디자인 가이드라인(Active Design Guidelines)’을 발표했어요. 건강이 도시의 최대 이슈가 된 거죠. 과거엔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죠. 지금은 대부분 만성질환으로 고생해요. 도시계획 단계부터 걷게 만들자는 게 뉴욕의 아이디어입니다. 팽창 도시의 표본이었던 뉴욕이 또 다른 트렌드를 만들고 있는 거죠. 나는 차가 없어요. 아예 소유하고 있지 않아요. 뉴욕·로테르담 거주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어요.”(뉴욕이 최근 타임스스퀘어의 차도를 줄이고, 하이라인 파크를 건설한 것도 이러한 도시계획 지침과 관련이 크다.)



 -정= “나도 파리에 살 때 10년간 차가 없었고 한국에서도 차를 사지 않았죠. 인간의 진화단계나 성장단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네 발로 기다 두 발로 걷게 되죠. 직립보행은 인간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걷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행위입니다. 도시가 그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거죠.”



 ‘걷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서울역고가 공원화 이슈가 등장했다. 선진국과 같이 ‘걷는 도시’를 지향하는 서울의 현주소는 어디고, 서울역고가 공원화는 정말 필요한가, 사업 추진 과정에서 문제는 뭔가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승=“총괄건축가로서 먼저 얘기할게요. 해외 도시에 가서 걸으면 거의 끊김 없이 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죠? 최근 20년간 보행공간이 많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전부 파편화돼 있어요. 우리의 계획은 끊어진 길을 잇는 겁니다. 광장·공원 같은 공공건축이 서울에 어떻게 배치돼 있고 어떻게 끊겨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공성 지도’를 만들고 있어요. 서울역고가는 서울에서도 가장 파편화돼 있는 서울역 인근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겁니다.”



 -정=“시장이나 대통령이 주도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주장은 곤란합니다. 핵심은 ‘리더가 시대와 시민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는가’라는 점이죠. 사업을 진행하는 공무원과 전문가의 가장 큰 자질은 ‘소통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결정되는 과정, 실현되는 과정, 건축되는 과정, 과정마다 시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무원은 시대적 요구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죠. 시장 임기인 ‘4년 안에 만들 수 있는 것’만 고려해선 안 됩니다. 도시는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지는 생물 같은 존재예요. 전임 시장의 업적을 존중하고 늘 연속성을 생각해야죠. 그러지 않으니까 늘 정치적 논란이 이어지는 겁니다. 제가 하나 제안할게요. 랜드마크가 될 시설은 정치인이 아닌 디자이너 혹은 건축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겁니다. 서울역고가도 박원순 시장이 아닌, 가령 승효상 선생과 같은 건축가의 이름을 거는 겁니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ee)도 건축가 이름이 다 있죠. 필리프 마티유와 자크 베르젤리. 작은 것 같지만 큰 차이라고 봅니다.”



 -조=“시민으로서 나도 승 선생님께 제안할게요. 서울역고가는 끊어진 공간을 잇는 좋은 묘수입니다. 다만 그곳이 코너 돌면 스타벅스만 계속 보이는 그런 공간이 되게 하진 마세요. 젊은 친구들이 몰려와 작은 가게를 내서 그 동네가 입소문을 타면, 결국 임대료가 올라 젊은이들이 쫓겨나죠. 하지만 지역의 정체성과 발전을 위해 그런 젊은이는 반드시 필요해요. 그런 캐릭터가 살아 숨쉬게 해주세요.”



 -승=“공감합니다. 이번에 리모델링을 시작하면 한번에 끝내지 않을 거예요. 하나를 시도해보고 그 반응을 볼 거고 의견을 물을 겁니다. 만약 이견이 크다면 설계안을 수정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요. 묻고 시행하고, 묻고 진행하겠습니다. 단계별로 차근차근 진행하겠습니다.”



글=강인식·강기헌·장혁진 기자 kangis@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