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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성 칼럼] 가계경제 없는 나라경제가 무슨 소용인가

중앙일보 2015.05.12 00:02 종합 35면 지면보기
장하성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나라경제를 먼저 걱정하는 애국심은 지도자의 몫이지만 서민들은 당장 내 살림이 나아져야 나라 걱정도 할 수 있다. 나라경제가 걱정인가? 적어도 성적표만 보자면 괜찮은 편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성장률이 줄곧 최상위권이었고, 2008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 이후에도 네 번째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문제는 날로 쪼그라드는 가계경제다. 이제 불평등 심화 정도나 속도가 선진국 중에서 최악인 미국에 육박하고 있다. 성장에도 불구하고 분배가 되지 않고 가계살림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라경제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화된 나라가 된 것은 분배구조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성장의 과실은 경제의 3주체인 가계와 기업, 그리고 정부가 나누어 갖는다. 국민총소득 중에서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어가는 몫은 1990년 13%에서 2013년에도 13%로 전혀 변화가 없다. 한편 가계소득 비중은 90년 70%에서 2013년 61%로 9%포인트가 줄었다. 같은 기간에 기업소득은 17%에서 26%로 9%포인트가 늘었다. 정확하게 가계소득이 줄어든 만큼 기업소득이 늘어났다. 이 말은 가계는 국민경제가 성장한 만큼 분배받지 못했고, 줄어든 가계의 몫을 전부 기업이 가져갔다는 의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줄어든 가계 분배 몫 중에서 고소득층이 가져간 몫이 늘어났고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분배된 몫은 줄어들었으니 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가계가 가난해져 가니 저축도 될 리 만무하다. 총저축에서 가계저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년 43%에서 2013년 18%로 무려 25%포인트나 줄었다. 반면 기업저축의 비중은 같은 기간 35%에서 60%로 25%포인트가 늘었다. 가계저축이 정확하게 기업저축으로 이전된 것이다. 가계저축이 기업의 투자로 이어지는 자금순환의 기본적인 구조가 무너지고, 기업이 가계보다 더 많이 저축을 하는 상황이 굳어지고 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분배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가계는 저축의 주체가 아니라 부채의 주체가 되어버렸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90년 56%에서 2013년에 152%로 급격하게 늘어나 가계부채가 국가경제의 위험요소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늘어난 기업소득과 저축이 모두 투자에 쓰인다면 몇 년 후에는 다시 가계소득과 저축으로 환류되는 것이 정상적인 경제의 선순환 구조다. 그러나 한국은 투자 비중이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중에서 총고정자본 형성, 즉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90년에 40%였으나, 2013년에는 29%로 무려 11%포인트나 줄었다. 즉 한국은 투자를 안 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소비도 줄어들고 있다. 가계소득이 20년 동안 일방적으로 감소했으니, 가계소비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기만 했다. 국민총소득 중에서 민간소비 비중은 90년 59%에서 2013년에 47%로 줄어들었다. 이는 늘어난 기업소득이 투자로 이어져서 다시 가계소득과 가계소비를 늘리는 선순환 고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돈을 번 기업이 투자도 안 하고 분배도 안 하며 세금도 덜 내니 국민은 간데없고 기업만 부자가 된 것이다.



 미국은 한때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였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내 집을 가질 수 있고,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 있으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평등한 중산층의 나라였다. 이것은 극도로 심화된 불평등 구조로는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반성과 자각으로 1940년대 초반에 임금통제를 통한 강력한 분배정책을 시행한 것이 그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미국이 다시 100년 전보다 더 불평등한 나라가 된 것은 80년대 초부터 부자감세와 기업감세 같은 역분배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분배정책의 성공이 아메리칸 드림을 만들었고, 분배정책의 실패가 아메리칸 드림을 부숴버린 것이다. 그런 미국을 한국이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잘살기 위한 것이며, 잘사는 것은 잘 쓰는 것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성장이란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한 것이며, 소비의 주체는 기업이 아닌 가계다. 기업은 생산과 투자의 주체이지 소비의 궁극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 돈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득이 있어야 소비를 할 수 있고, 소득은 분배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소득을 나누어야 할 기업이 분배를 하지 않고 돈을 쌓아두기만 한다면 결국 나라경제를 좀먹게 된다. 국민 없는 나라가 없듯이 국민 소비 없이는 나라경제도 없다. 이제 기업이 잘되어야 국민도 덕 본다는 낙수효과라는 말이 한갓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 국민들의 가계살림은 갈수록 쪼들리는데 기업만 부자가 되는 나라경제를 외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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