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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개헌보다 경제, 그보다는 정치 개혁

중앙일보 2015.05.11 00:03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돌아가는 국내외 사정이 심상치 않다. 광복 70년이 다가오지만 우리는 아직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대국들의 압력을 느끼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고 여섯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지만 정치의 혼란은 국민들을 불안의 늪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다수 국민의 일상생활이 너무 힘들고 많은 젊은이가 일자리를 못 찾아 헤매는 상황에서 개헌 논의는 뒤로 밀고 우선 경제 살리기에 전력투구하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결정은 시의적절했다. 그러나 경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나, 그로부터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는 결국 정치적 판단과 선택의 문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개헌보다는 경제, 그보다는 정치 개혁에 우선순위를 두려는 것이 박 대통령의 입장이라고 이해된다.

 한국이 처한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오래전부터 예견됐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대화 이론이 활발히 전개되던 1960년대 전후, 민주화 과정을 처방한 정치발전론의 범람 속에서도 국가의 안정적 운영을 담보하는 정치질서 제도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새뮤얼 헌팅턴의 경고가 있었다. 70년대 포르투갈·스페인·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권위주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마감하고 민주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의 그리스 사태가 보여주는 정치 퇴화와 경제 파탄은 대중의 민주적 참여 확대를 안정적 국가 운영에 접목시키는 제도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순간의 흥분처럼 왔다 간 아랍의 봄도 그러한 정치 퇴화의 에피소드로 기억될 뿐이다.
 
 국민들의 오랜 염원과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출범시킨 87년 민주화 체제가 지나온 30년 가까운 과정을 돌이켜보면 시민의 광범위하고 활발한 정치 참여는 상당한 수준으로 확대된 데 비해 이를 안정적인 국가 운영의 순기능적 동력으로 활용하는 제도화에는 심각한 한계를 노출해 왔다. 민주화에는 성공했으나 거버넌스, 즉 국가 운영에는 퇴화의 징조가 누적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대원칙을 ‘다수의 통치와 소수의 권리 보장’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한국 정치는 다수의 통치도 안 되고 소수의 권리도 무시되는 정치퇴화증에 걸려 있다고 진단된다.

 이러한 정치 부진 속에서 한국 사회가 당면한 최대 과제는 빈부격차를 비롯한 불평등의 심화다. 이를 ‘이중화(二重化)’로 진단하는 장덕진 서울대 교수의 지적은 불평등이 경제뿐 아니라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시장의 약자들은 정치적으로 과소대표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비주류로 취급되고, 이념적으로도 발언권이 약한 것은 물론 상징적으로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화에 더하여 고령화에 따른 세대 간의 갈등과 같은 불평등 문제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의 힘이며 정치적 선택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노벨상을 수상한 조셉 스티글리츠도 근저(近著)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고 선택의 결과이며, 20세기의 불평등은 자본주의보다도 민주주의가 낳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결국 불평등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정치적 선택에서 찾아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한국의 경우에도 과감한 정치 개혁이 불평등 해소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긍정적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민주 체제의 개혁을 어떻게 진행시킬 것인가’라는 구체적 문제는 당사자인 우리가 지체 없이 풀어 가야 할 우선과제다.

 사회적 및 경제적 불평등을 권위주의 시대와 산업화 시대가 수반한 비인간화와 양극화의 결과라고 보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대통령제-관료국가의 종식과 의회국가 건설을 정치 개혁의 초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조윤제 서강대 교수는 지금의 한국에선 눈앞의 선거만 있고 미래의 국가 전략은 없으며 국정 운영의 장기적 비전과 행정이 결여돼 있으므로 무책임한 정치를 강화하기보다 대통령과 집행부의 권한과 임기를 강화하는 개헌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정치 위기에 대한 진단이나 개혁에 대한 학자적 입장이 상이한 것은 정치적 개혁에 대한 국민적 차원에서의 의견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질식이나 마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부정부패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다는 조치를 훨씬 넘어선 구조적 정치 개혁이 시급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통일 준비는 꼭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이 우리의 정치 개혁이다. 국민들의 바람과 꿈을 획기적 정치 개혁의 방향으로 연계시킬 수 있는 큰 줄기를 제시하는 작업을 대통령과 여야 지도자들이 지체 없이 시작해 주기 바란다.

이홍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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