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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영국일주

온라인 중앙일보 2015.05.11 00:01
[여성중앙] 지난겨울 그녀가 영국에서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행기를 청탁했을 때, 그녀는 아직 영국에서 햇살 찾아 삼만 리 중이라며 두 달째 머무는 동안 체력이 고갈되었다는 답을 해왔었다. 베스트셀러『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의 정여울. 그러곤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와 그 석 달간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80일간의 영국 일주'

1 런던의 밤거리. 빨간색 이층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거리 풍경이 언제 봐도 사랑스럽다. 2 리버풀의 비틀즈 전시관. 추운 겨울에도 수많은 사람이 비틀즈의 추억을 곱씹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 영국을 가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여행자를 유혹하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귀로 듣기에 더욱 달콤한 장소가 있다. 미술과 패션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는 눈이 즐겁고,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는 귀가 더욱 즐겁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요리로 미각과 후각을 즐겁게 하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일본 오키나와나 아이슬란드처럼 자연을 체험하는 촉각의 기쁨으로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곳도 있다.



영국은 그 모두가 아니었다. 영국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화려한 스펙터클이 많지 않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나라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의 쾌락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꼭 로마나 바르셀로나처럼 대도시가 아니어도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지만, 영국에는 그렇게 개성 넘치는 소도시가 많지 않다. 가는 곳마다 ‘비슷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가장 깊은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나라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영국을 선택할 것 같았다.



본격적인 영국 앓이를 시작한 것은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부터였다. 산업혁명부터 인터넷까지 인류사를 뒤흔든 거대한 격변들, 셰익스피어부터 찰스 디킨스를 거쳐 조엔 롤링까지 세계적인 작가들, 전 국민 무상 의료보험과 의무 교육까지. ‘이 모든 것이 다 영국에서 시작되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부러움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꼈다.



대니 보일 감독은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세상에 하나뿐인 영국’의 온갖 자랑거리를 세련되게 전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적 착취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 제국주의가 가장 먼저 발흥한 곳도 바로 영국이다. 스모그라는 이름의 대기 오염이 가장 먼저 시작된 나라, 슬럼이라는 이름의 소외된 도시 공간이 가장 먼저 빠르게 번져간 나라도 영국이다.



세상 모든 눈부신 것과 그림자가 그 어느 곳보다도 더 빨리, 더 위력적으로 시작된 곳이 바로 영국인 셈이다. 문명의 빛만큼이나 문명의 그림자도 가장 많이 잉태한 곳이 내게는 영국이었다. 이것이 영국이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이유 중 첫 번째였다.



그런데 그런 지적 호기심을 넘어 내게 가장 매혹적인 영국의 모습은 따로 있었다. 나에게 영국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찰스 디킨스, 에밀리 브론테와 샬롯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올더스 헉슬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제임스 매튜 베리 그리고 닉 혼비까지. 이 모든 작가가 다 영국 출신이다.



언뜻 생각했을 때 좋아하는 작가가 다섯 명이 넘어가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매년 혼자서 ‘내가 사랑하는 작가 리스트’를 국가별로 만들어보는데, 부동의 1위는 항상 영국에 있었다. (물론 한국을 제외한 결과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가장 많은 곳은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부터 늘 한국이었다. 모국어의 위안과 모어 문화의 토착성을 뛰어넘는 외국 문학을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



2014년 1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영국 일주를 하면서, 나의 지적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이 놀라운 영국 문학의 비밀은 바로 그들의 도서관 문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딜 가나 훌륭한 도서관이 마을의 수문장처럼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특히 버밍엄 도서관, 리버풀 도서관 그리고 맨체스터 도서관은 런던의 대영도서관조차 가지지 못한 어떤 특별한 매력을 저마다 품고 있었다. 입장료나 이용료가 없어 오직 지식과 정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기탄없이 찾아갈 수 있는 시민의 도서관이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친절한 사람들, 문화의 향기로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내게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음에도 어딜 가나 청결하고 쾌적한 공간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가장 문화적이고 대중 친화적으로 ‘공공의 장소’를 행복하게 공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요금을 부과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는 ‘공용공간’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의 비극 중 하나라고 했다. 공용 공간의 아름다움과 실용성 그리고 공동체적 정서를 극대화한 곳이 바로 공공 도서관이 아닐까.



그 수많은 도서관의 중심에는 책을 사랑하고 문자를 사랑하는 이들, 종이로 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인들은 아직도 종이 신문을 많이 읽고, 아침마다 지하철 무가지 ‘메트로’를 정독한다.



전자 기기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자세히 가서 살짝 엿보면 전자책이나 신문을 읽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게 영국의 희망인 것 같았다.



또 하나의 정겨운 풍경은 직접 펜을 들고 ‘낱말 맞추기 퍼즐’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이 자신이 출제한 난해한 낱말 퍼즐을 5분 내에 다 맞추는 사람을 함께 일할 최고의 연구원으로 뽑는데, 이런 기상천외한 구직 문화가 가능한 것도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국민이 매일 낱말 퍼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낱말 퍼즐은 논리적 사고뿐 아니라 감성적 사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 온갖 낱말들을 상상하고 예측하고 재배치하면서, 우리는 조금 더 사려 깊고 감수성이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버밍엄 도서관 내부. 버밍엄 도서관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흥미롭다. 특히 거대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갈 때 본 ‘책 읽는 사람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문자를 사랑하는 영국 사람들



이번 여행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세계 표준시가 시작되는 곳에서 연말연시를 보내는 것이 왠지 뜻깊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는 그리니치 천문대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런던에 숙소를 잡고 이튿날 아침 그리니치 천문대로 가는 길 자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리니치로 가는 길에는 거대한 커티삭 호가 ‘어서 빨리 이 낡은 땅을 박차고 바다 저편으로 항해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웅장하게 서 있었다.



그리니치 공원에서는 추운 겨울이 무색할 정도로 푸르른 잔디와 청초한 꽃들이 나그네를 반겨준다. ‘시간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모아놓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한 그리니치 천문대 내부의 박물관에는 이 세상 모든 시계를 몽땅 수집해놓은 듯한 엄청난 시계 컬렉션이 있다.



‘우리 다음 주 수요일 오후 2시에 만나자’는 약속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근대적 시간의 탄생’ 이후였다. ‘내가 말하는 오후 2시’와 ‘그가 말하는 오후 2시’가 같으려면 표준시는 물론 시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로 묶어주는 강력한 미디어, 시계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더 발달된 문명과 심오한 문화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표준시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24시간의 발명 같은 것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좀 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닭이 우는 소리로 새벽을 느끼고, 달빛이 차오르는 모양으로 날짜를 세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4시간 365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또 나름의 낭만과 서정이 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지금 몇 시인가’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극히 인위적인 규정이겠지만, ‘세계 표준시’를 정해서 그에 따라 조금씩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상황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시차를 느끼며 여행한다는 것은 ‘두 개의 시간’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오는 대부분의 전화는 내가 영국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왔고, 나는 그 전화들을 받지 못함으로써 ‘어긋난 시간’을 경험한다. 한국에 있었다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여행 중에는 부득이하게 거절하게 되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일에만 빠져 사느라 미처 돌보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렇게 불가피한 시차 속에서 ‘두 개의 시간’을 살다 보면, 고국에 두고 온 ‘나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더 절절하게 깨닫곤 한다. 그리니치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 곳은 스톤헨지였다. 아직 ‘유럽 여행 중독자’가 되기 이전에, 막연한 동경의 마음으로 영국 여행 책자를 뒤지면서 가장 설레던 장소가 스톤헨지였다.



여행 책자 속에서 솔즈베리 대평원의 웅장한 모습과 스톤헨지의 장엄한 석양이 나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욱 아름다웠겠지만, 솔즈베리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 짙은 안개로 가득한 옛 도시의 정취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한겨울 영국 여행 일주일 차쯤 되면 ‘맑은 하늘’에 대한 기대를 저절로 접게 된다. 구름이 가득한 그대로, 안개가 자욱한 그대로, 그 나름의 ‘하늘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솔즈베리 역에서 버스를 타고 안개 속을 헤치며 한참 달린 후에야, 저 멀리서 스톤헨지의 위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톤헨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나는 미지의 시간을 향해 정처없이 떠나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때마침 거대한 돌기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까악까악 울어대는 까마귀의 실루엣은 스톤헨지를 여전히 살아 있는 미스터리로 만들고 있었다.







1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세계 표준시의 경계 위에 선 사람들. 땅 위의 저 경계선을 두고 ‘어제’와 ‘오늘’이 갈라진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며 세계 표준시의 경계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2 글래스고의 명물, 리버사이드 박물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의 작품이다



3 런던 박물관. ‘셜록 홈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셜록 홈즈의 안경, 책, 지팡이, 우산, 심지어 셜록 홈즈의 코트까지, 셜록홈즈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어 영국인들의 ‘셜록 앓이’를 실감할 수 있다.



4 버밍엄 미술관. 미술관에 가면 나는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길’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저렇게 차분하게 미술 작품을 감상하며 늦은 오후를 보낼 수 있는 여유와 감성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게 된다.





그리니치에서 스톤헨지, 문학의 도시 에딘버러까지



잉글랜드 지방 또 하나의 명소는 캠브리지였다. 나룻배를 타고 삿대를 저으며 천천히 캠브리지 강을 저어가는 펀팅은 캠브리지와 옥스포드의 명물일 뿐 아니라 영국을 가로지르는 에이번 강의 명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 오는 캠브리지에서는 그토록 설레는 마음으로 꿈꾸었던 ‘펀팅’을 포기해야 했다. 지난해에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보러 찾아갔던 에이번 강에서는 성수기에도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펀팅을 즐길 수 있었다.



날씨가 추운 데다 비까지 내리는 캠브리지에서 내가 그나마 위안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서점 구경이었다. 서점에 털썩 주저앉아 책을 읽는 소녀들의 모습은 추위로 얼어붙은 내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었다.



캠브리지 서점은 도서 분류법이 매우 재미있었는데, 예컨대 ‘닥치고 읽어라!’라는 코너도 있었고, ‘당신이 늘 읽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읽지 못한 책’이라는 코너도 있었다. 특히 서점 직원들이 자신 있게 추천한 책들로 이루어진 컬렉션들이 볼만했다.



리버풀과 리즈, 요크, 맨체스터를 거쳐 드디어 에딘버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비로소 ‘스코틀랜드의 정수’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과연 건축 양식이나 영어의 표기법 자체가 잉글랜드 지방과는 확연히 달랐다. 스코틀랜드 지방을 여행하면 ‘두 개의 영어’를 동시에 체험하는 듯한 느낌인데, 스코틀랜드 게일어와 잉글랜드 지방의 영어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많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최초의 ‘문학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에딘버러 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많이 보인 것은 스코틀랜드 민중의 위대한 작가 월터 스코트 경의 시구절들이었다.『지킬 앤 하이드』『보물섬』으로 유명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뿐 아니라 해리포터 시리즈로 사랑받은 조앤 롤랭도 에딘버러 출신이다.



엄청난 비바람이 매일 휘몰아쳤던 에딘버러에서 나는 급격한 체력 저하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나의 피난처’라고 했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고백처럼, 나도 여행과 소설과 글쓰기를 피난처 삼아 ‘삶’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힘겹게 치르고 있었다.



이번 영국 여행은 글을 쓰기 위한 여행도 아니고, 즐기기 위한 여행도 아니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다만 무작정 떠났던’ 방황의 여행이기에 나는 더욱 빨리 지쳐버렸던 것이다. 그 순간 월터 스코트 경의 시구절이 기차역 한쪽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을 짐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게조차도, 삶이란 소중한 축복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왠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나는 항상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주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나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붙이곤 했다.



그런 습관 때문에 좋은 평판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 같다. 이제 그런 나를, 인생 자체가 짐이라고 느끼는 나를 놓아보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날 이와 비슷한 아름다운 문구를 또 하나 발견했다. 시인 러스킨의 문장이었다. “인생보다 더 소중한 재산은 없다.” 정말 그렇다. 나는 이미 인생이라는 최고의 재산을 원없이 누리고 있다.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세상에게 좋은 것들만을 기대하지 말자.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후 인버네스, 글래스고, 스털링, 던디, 애버딘 등 스코틀랜드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나는 점점 ‘한겨울 비수기의 겨울 여행’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마음의 오아시스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자 술집 간판에 쓰인 평범한 문구도 나를 미소짓게 했다. “배고프니? 우린 음식이 있어. 목마르니? 우린 술이 있어. 외롭니? 우리에겐 술이 있다니까.” 아주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손님을 유혹하는 그 술집의 간판이 인생의 정수를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됨과 동시에 국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힘드니? 우리에겐 도서관이 있어. 외롭니? 우리에겐 위스키가 있어. 슬프니? 우리에겐 네 슬픔을 나눌 친구들이 있다니까!’ 나는 영국의 수많은 도서관에서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뒤져보며 시름을 잊었다.



거리 곳곳에 널려 있는 펍(Pub)에서 한 잔씩 홀짝홀짝 반주(飯酒)를 들이키며 외로움을 잊었다. 한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어디든 ‘마음을 끄는 장면’이 있다면 온갖 악천후를 무릅쓰고 찾아간 나의 뚝심(?)에 감복한 영국인의 친절 덕분에, 그 겨울 나는 그토록 모국어와 김치찌개와 가족들이 그리웠음에도 진정 외롭지 않았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주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생시키고 전혀 다른 모험 속으로 몸을 던지게 하는 장소야말로 치유의 장소이자 성장의 장소다.





정여울은... 문학평론가이자『그림자 여행』『마음의 서재』『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등의 저자다. 오늘도 ‘일상을 여행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삶을 모색하고 있다.







1 에딘버러에 있는 한 술집의 간판. 배고프니? 목마르니? 외롭니? 이런 질문이 이토록 가슴 저린 이유는 오랜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방랑자의 객수(客愁)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외롭고 춥고 배고픈 영혼이 되어보는 것은 여행이 지닌 또 하나의 슬픈 매력이다.



2 에딘버러 작가 박물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여행 사진들, 여행 가방과 망원경, 자필 편지와 초판본들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작가의 흔적은 작품만큼이나 독자를 감동시킨다.



3 던디에서. 겨울 해변에서 그야말로 오랜만에 햇살의 축제를 발견하고 너무 기분이 좋아 막춤을 추어버렸다는 정여울 작가.



4 캠브리지 거리에 서 있는 소녀. 정여울 작가의 최근작 『그림자 여행』에도 실려 있는 사진이다.



5『해리포터』시리즈가 태어난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시리즈를 집필했던 카페다.『해리포터』의 초판본 사인이 담긴 책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해리포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성지가 되었다.





기획 여성중앙 조영재, 사진 정여울·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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