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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아이들 생각도 좀 합시다

중앙일보 2015.05.06 00:12 종합 34면 지면보기
양선희
논설위원
어린이날에 이 글을 쓰며 ‘어른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어린 시절엔 어른들이 있었다. 어른들은 늘 “우리 자식들은 더 좋은 세상에 살도록 하겠다”며 당신들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밥상머리에선 바르게 살라고 강변했고, 밥 한 톨에 담긴 농부의 땀을 설파하며 우리는 모두 공동체의 헌신 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했다. 부모들만이 아니었다. TV에 나온 높은 분들도 ‘교육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이들 눈을 두려워했고, 미래를 염려했다. 한데 지금, 그 ‘어른다움’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득 애들 보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건 홍준표 경남도지사를 보면서였다. 그가 “메모나 녹취록은 특신상태(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므로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한 순간이다. 불미스러운 기업인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도 말했다.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 “잘못이 밝혀지면 그만두는 것.” 홍 지사는 이들 ‘증거 시리즈’의 결정판이었다.



 과거 검사 시절의 홍 지사가 말했듯 “뇌물사건의 80%는 증거가 없다”니 금품수수 여부와 상관없이 증거가 없다면 형사처벌은 면할 거다. 하나 그들은 행정부 리더로서, 어른으로서 보여줘야 할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는 리더들에게 정직함과 책임감을 기대한다. 한데 그들은 ‘~한다면’ 화법으로 진실을 흐렸고, 여론조사 결과 국민 열 명 중 8명은 성완종 리스트의 금품수수가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심받는 것 자체도 큰 죄’라며 배 밭에선 갓끈도 고쳐 매지 않았던 선비정신 같은 건 애당초 없다.



 ‘~한다면’ 화법보다 교육적으로 더 나쁜 건 ‘법치’를 오도했다는 거다. 이번 정부는 법과 원칙, 법치를 무엇보다 강조한다. 한데 이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금품수수 의혹 앞에 사실보다 ‘증거를 찾아내라’고 다그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법치는 진실보다 증거’라는 꼼수부터 배우게 될까 두렵다.



 ‘새삥(신입)에게 독박 씌운다’. 지난 주말 여야 지도부가 ‘사회적 대타협’을 이뤘다고 자랑했던 공무원연금법 개혁안에 참여했던 한 학자가 했다는 말이다. 개혁안을 들춰보니 재정적 폭탄을 미래세대에 떠넘긴 꼼수였다는 비판을 인정하면서다. 숫자·전문용어 같은 어려운 얘기 다 빼고, 간단하게 말하면 기존 공무원은 크게 손해보지 않고, 신입 공무원부터 연금이 확 준다는 게 요지다. 공무원 연금 개혁은 국민 세금으로 메워주는 연금의 적자폭이 하루 100억원대에 이르니 이 부담을 줄이자는 데서 시작했다. 개혁안으로 적자 폭은 약간 줄었다.



 한데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줄인 재정부담분만큼을 국민연금에 얹어주겠다고 여야 지도부가 타협했단다. 명목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50%로 늘리겠다는 거다. 물론 50~60대 우리 세대엔 좋은 소식이다. 한데 공무원연금은 국가 재정에서 부담하지만, 국민연금은 세대 간 부조 형태다. 정부가 보조해 줄 방법이 없다. 소득대체율을 늘려놓으면 결국은 젊은 세대가 그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대통령도 ‘미흡’ ‘월권’을 질타한 개혁안이 어째서 화기애애하게 통과된 걸까. 대다수 유권자인 장년층 비위 맞추느라 표(票) 안 되는 아이들한테 ‘독박’을 씌운 걸로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일각에선 차기 대권주자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간의 ‘대권카르텔(담합)’설까지 나온다. 대타협의 이미지와 공적연금 강화 약속을 지켰다는 이미지를 위해 미래세대 등골 빼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 여야 대표. 아이들 미래는 안중에도 없는 이런 어른들의 세상에 아이들을 두기가 두렵다. 누군가 그랬다. 우리 사회는 지배권력층만 있고 사회지도층은 없다고. 사회지도층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 아버지 세대가 그랬듯, 아이들 생각도 좀 하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려는 고민을 해줬으면 좋겠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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