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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조훈현이 커피 나르던 권금성산장, 거기 한국 3대 털보가 있었네

중앙일보 2015.05.06 00:02 강남통신 10면 지면보기
38년간 설악산을 지켰던 유창서 전 권금성산장지기는 2007년 산장이 철거된 후 속초로 내려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뒤로 멀리 설악산이 보인다. [김경록 기자]

‘설악산 반달곰’으로 불렸던 사내였다. ‘지리산 호랑이’ 고(故) 함태식, 설악산 백담산장의 고(故) 윤두선과 함께 ‘한국 3대 털보 산장지기’로 꼽혔다. 바로 유창서(77) 설악산 전 권금성산장지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2007년 산장이 철거되기까지 38년을 산장지기로 살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산이 좋아 산악인이 됐고 서른한 살에 혈혈단신 설악산에 들어와 산장지기를 했다. 조난 당한 등산객 수백 명을 구했고 그보다 많은 추억을 설악산에서 만들었다. ‘빨간 베레모 쓴 남자’로 설악산 못지않게 유명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산과 함께했던 그의 인생을 들었다.

‘설악산 반달곰’ 유창서씨


시레이션 캔에 촛불 켜고 올라간 도봉산

유창서씨가 산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배재고 1학년 때였다. “둘째 형님이랑 백운대·도봉산을 다녔어요. 산에 올라가서 저녁 노을을 보는데 진짜 좋더만.” 그를 산으로 안내한 둘째 형님은 고(故) 유용서 도봉산장지기다. 유씨는 처음 본 산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지금 백운대·도봉산이 아니야. 전차 타고 돈암동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했지. 전지(배터리)가 없어서 ‘시레이션 캔’에 구멍 뚫어서 촛불 켜고 올랐어.”

 지금은 원로 암벽등반가가 된 여섯 살 위 전담씨를 만나 클라이밍에 빠지기도 했다. 자일(등산 로프) 같은 장비가 없어 백운대 절벽에 찾아가 장비를 갖춘 등반가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유복했다. 아버지는 평안북도의 ‘광산 거부’ 유흥산씨다. ‘오북금광’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 화약 배급이 중단되자 금광을 팔고 서울로 내려왔다. 화약이 없어 굴을 뚫을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유씨가 삼청동에서 태어난 건 그때였다. 아버지는 다시 경기도 평택으로 내려가 광산 사업을 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에 발을 들여 한국민주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그러다 인감도장을 남에게 맡겨 남은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다. 몸 누일 집 한 칸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유씨도 반 노숙 상태로 지냈다. 친구 집에 머무르기도 했고, 백운대 동굴에서 둘째 형과 지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등산에 더욱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 배재고에 등산부를 직접 만들었다.

 1957년 홍익대 지리학과에 들어갔다. 고교 때부터 함께 산을 타던 친구 둘과 함께 그해 여름 설악산에 올랐다. 설악산이 민간인에게 개방된 직후였다. 텐트 치고 산에서 자다가 우연히 동국대 산악부를 만났다. 거기에 동국대 부총장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다음 해 그는 동국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동국대로 옮겨 처음 설악산 겨울 등반을 갔던 때 일이다. 당시엔 설악산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새벽 4시25분 숭인동 첫차를 타면 오후 5시쯤 강원도 속초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해 설악산 초입에 있는 ‘신흥사’라는 절에 다음 날 새벽 4~5시쯤 닿았다. 정작 산에 오르기까지 만 하루가 걸렸던 것이다.

 당시 설악산에는 지금 같은 등산길이 없었다. 없는 길은 만들고 절벽은 올라타 넘었다. 지금 4시간 코스가 당시에는 2박3일 걸렸다. 6·25전쟁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가다보면 사체들이 보였지요. 한 골짜기에 들어섰는데 한국군 8명이 몰살돼 있더군요. 쏘지 않은 총알, 박격포탄이 쌓여 있었어요. 대청봉 근처에는 수류탄이 산처럼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요. 지뢰가 묻혀 있어도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어디 함부로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한 법 아니겠어요.” 그의 말대로 “무식해서 용감했고” 산이 좋아 두려움도 없었다.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백담산장 윤두선과 함께 3대 털보
“회사 다닐 땐 불성실한 사원, 산에 조난사고만 나면 나갔지
광산 거부였던 집 몰락 후 맘 다잡아 준 게 산이었어”


 
뒷줄은 유창서씨(왼쪽)와 그의 형 고 유용서씨. 아래줄 맨 오른쪽부터 고 윤두선·함태식씨, 사진작가 고 김근원씨.


대기업 박차고 설악산으로 들어간 까닭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그는 군에 갔다. 그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유유자적할 만큼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이 일 저 일 하다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불성실’한 사원이었다. 산에서 조난 사고가 터지면 그에게 연락이 갔다.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했다가도 사고가 터지면 경찰서 ‘백차’가 와요. 그러면 일단 매점에 가 빵 사먹고 근처 친구네에서 옷 갈아입고 산을 갔어요. 당시 안국화재에 근무했는데 부서장이 이맹희씨였어요. 이런 일도 한두 번이지 회사에서 좋아할 리 있겠어요. 당시에 사체 20~30구는 치운 거 같아요.” 죽은 이들을 자꾸 만나다 보니 마음의 병을 얻었다. 신경쇠약이었다. 회사를 다닐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즈음이었다. 69년 2월 14일 해외원정을 앞둔 한국산악회 소속 대원 10명이 눈사태로 조난 당하는 일이 터졌다. ‘10동지 조난사고’다. 그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가 제일 늦게까지 현장을 지켰다. 21일 동안이었다. “자다가 눈사태를 맞은 거예요. 10명 중 8명을 내 손으로 보내줬어요.” 그해 가을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왔다. 일종의 도피였다. 집에 말도 않고 단출한 보따리 하나만 챙겼다. “혼자 편하게 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천막 치고 살고, 남의 집 문간방 얻어 몸만 뉘었다. 이때쯤 정부가 전국의 산에 산장을 짓는 사업을 추진했다. “대한산악연맹에서 추천을 받아 산장지기를 하게 됐죠. 처음 올라간 날이 71년 1월 15일인가 그래요.” 38년 5개월간 이어진 산장지기 삶의 시작이었다.

 첩첩산중 속 산장에서도 사랑은 꽃폈다. 여섯 살 어린 대구 처녀는 친구와 함께 설악산에 올라왔다. 산장에 오긴 왔는데 하필 그날따라 내려가야 할 케이블카가 고장이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걸어서라도 내려가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대구 처녀 일행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룻밤 보낸 게 인연이 됐다. 편지가 오가고 몇 달 뒤 그 처녀가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연애 1년 만에 둘은 결혼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고 신부 이름은 황국자였다. 1년 후 아들이 태어났다. 혼자 편하게 살겠다고 들어온 산에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늦은 나이에 아들까지 얻으니 그야말로 “참 묘한 일”이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면서 가족 모두가 산장 생활하기엔 어려워졌다. 산 아래 마을에 집을 구해 아내와 아들을 내려 보냈다. “친구나 후배가 산장을 봐주면 케이블카 타고 저녁에 내려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올라오곤 했지.” 그렇게 키운 아들이 이제 마흔한 살의 중년이 됐다.

 


가장 힘든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권금성에서

산장지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76년에 일어났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대한산악연맹 해외등반 원정대원들이 국내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2월 16일, 이 중 3명이 눈사태로 조난을 당했다. 당시 대장이었던 고(故) 최수남(당시 35세)도 이 중 하나였다. 사고를 당할 때 최 대장이 썼던 헬멧은 유창서씨의 것이었다. “평소에 헬멧 잘 안 쓰던 놈이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그 녀석이 모자를 빌려 달라는 거야. 참 하여간 알 수 없는 일이야.” 당시 트레이너였던 그는 베이스캠프에서 점심을 먹으려다 조난 사고를 알게 됐다. 눈으로 새하얀 산자락에서 자신의 헬멧을 쓴 채 싸늘한 주검이 된 후배를 찾아냈다. 떠나간 3명 모두 유능한 산악인이었다. “다 찾아서 내 손으로 입관 시켰어. 회사에서 강릉으로 출장 오면 일 얼른 끝내고 우리 산장에 와선 내 장비 꺼내 바위 오르던 놈이었어.” 76년은 ‘69년 10동지 사고’ 이후 국내 두 번째 대규모 조난 사고가 일어난 해였고 그에게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였다.

 그에게 산장지기 생활은 곧 설악산 구조대원 생활이기도 했다. 산장 들어와 설악산 아래 사는 약초꾼이며 등산 가이드 10명을 꾸려 구조대를 만들었고 70년대에 대한적십자 지원을 받아 설악 구조대장을 맡기도 했다. “아마 구조한 사람이 수백 명, 사체 치운 것만 수백 구 될 거요.” 그는 이런 공로로 80년 10월 5일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상을 받고 나선 지인이며 친구들에게 술 사주기 바빴단다. “지금은 그 상이 집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그때 여섯 살 아들 녀석한테 ‘너도 훌륭한 일 하면 이런 거 타는 거야’하고 자랑 한번 해봤네.”

 같은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사는 그를 사람들은 ‘설악산 반달곰’ ‘빨간 베레모 쓴 남자’로 불렀다. 그는 권금성산장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고 이 중에는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도 있다. 그는 한국 바둑계 인사와 인연이 각별하다. “김인이랑 조훈현은 자주 왔어요. 인연이 꽤 오래 됐죠. 김인은 술고래인데 조훈현은 술 한 잔도 못해요. 대신 골초지요.” 여기서 김인과 조훈현은 한국 바둑계 1인자 계보를 이었던 바로 그들이다. 한번은 조훈현 국수와 이런 일도 있었다. 그와 조훈현 국수가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신혼부부가 산장에 들어왔다. 커피를 주문하길래 조 국수가 커피를 날랐다. 그 부부가 “혹시, 혹시”하며 계속 고개만 갸우뚱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조 국수 맞다고 그러니까 손님들이 아주 발딱 일어나더니 ‘어구구’하며 90도로 인사를 하는 거야. 하긴 조훈현 국수가 산장에 와서 커피 나르리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어. 허허.”

 71년에 처음 생겨 2000년대에 들어올 때까지 권금성산장은 그곳에 있었다. 이제 산장은 그에게, 찾아온 이에게도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곳이 됐다. 산장을 시작하고 몇 년 뒤부터 산장 안 한쪽 벽면은 관광객들이 남기고 간 메모들로 채워졌다. 그는 이 메모지를 매달 한 번씩 걷어 날짜 순으로 정리해 묶었다. 산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했다. 수년 만에 산장을 찾은 관광객이 그에게 “몇 월 며칠 메모를 보여 달라” 하면 정리해 놓은 철을 꺼내 주곤 했다. 그는 이 메모 사연으로 묶은 책을 90년과 92년에 내기도 했다. “20년 전 신혼부부로 함께 왔다 남편을 떠나 보낸 중년 여성이 그 때 써놨던 메모를 보고 울더군요. 30년 세월의 메모를 매번 정리해 놓았으니 산장 내려 오기 직전까지도 옛날에 썼던 메모를 보여달라는 분들이 더러 있었지요.”


약초꾼 모아 구조대 시작, 수백 명 구하고 국민훈장
38년간 권금성산장 지켰지만 2007년 시설 노후화로 철거
남은 건 주저앉은 척추뼈 7개…“이게 인생이니까”


 
유씨가 1971년부터 2007년까지 살았던 권금성산장 모습.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내가 살아있는 건 산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오”

이렇게 그의 한 평생이라고 할 만한 권금성산장은 2007년 철거됐다. 산장이 너무 낡았고 산장과 연한 탐방로도 등산하기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이유였다. 그는 이후 강원도 속초 시내에 내려와 아내와 함께 산다. 그의 소일거리는 낚시다. 이 취미마저 산 때문에 배워놨던 거다. “구조하면서 죽은 사람을 보고 만지잖아요. 젊은 시절에도 그런 일로 신경쇠약을 앓았는데 살악산에서도 구조를 하다 보니 가위에 눌리고 꿈에서 죽은 사람이 또렷이 나타나는 거에요. 한 정신과 교수가 바다로 낚시를 가서 릴을 던지며 막 소리를 지르라고 하더라고요. 주변에서 미친놈이라고 해도 좋다고. 진짜 미치는 것 보단 낫지 않느냐면서요.”

 그런데 최근에는 이 낚시마저 다니지 않는다. “요새는 시간 보내기가 힘들어요.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젊어서 너무 혹사 시켜서 그런지.” 사람 업고 뛴 것만 평생 수백 번이었다. 그 세월을 지내오며 허리뼈 4개, 목뼈 3개가 주저 앉았다. 날다람쥐 같이 산을 오르던 젊은 유창서는 지금은 “평지 100미터를 걷기 힘들다”고 말하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이게 인생이니깐…젊은 시절 집안이 흔들릴 때 방황하는 나를 잡아준 게 산이었어요. 산이 아니었다면 그때 거칠었던 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산이 그러지 말아라 그러는 거야. 바른 길로 갈 수 있게끔 해줬지. 그래서 더 산을 좋아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건 산이 내 마음에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속초=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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