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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성완종의 선택은 오판이었다

중앙일보 2015.05.04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권석천
사회2부장
당신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기자가 통화 내용을 잘 녹음했겠지, 사람들이 많이 놀라겠지,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메모지가 점퍼 주머니에 들어 있는지도 확인할 것이다. 당신은 다시 정면을 응시한다.



 당신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다. 110원을 들고 상경해 악착같이 기업을 일으켰다. 모든 일을 인간관계로 풀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신에게 돈은 중요했다.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화려한 학력과 배경을 과시하던 자들도 당신에게서 돈을 받을 땐 고개를 숙였다. 학연이란 버팀목이 있었다면 당신이 그렇게 돈에 기대는 일도, 이렇게 내몰리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당신은 길 위에서 검사들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검찰 조사를 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세 번 재판에 넘겨졌다. 두 번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고 속삭인 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정말 막다른 골목이다. 평생을 바친 기업의 경영권과 지분까지 포기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사면이란 선물을 내밀 것인가. 당신은 이를 악문다.



 그 순간 당신은 알지 못하고 있다. 당신의 마지막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메모 속 8인과 새누리당에 치명상을 입히고, 대통령을 경고해야겠다는 다짐이 대단한 착각임을. 첫 번째 반증이 4·29 재·보선이다.



 당신이 오판한 이유는 메모 안에 있지 않다. 메모 밖에 있다. 메모에 적힌 이들에게만 줬겠느냐는 불신, 회사 자금에 손을 댄 당신의 뒤늦은 내부 고발, 그리고 여당의 물 타기 전략이 정치적 냉소주의를 만연시켰다. 공허한 마음에 식탐이 파고드는 법. ‘길이 뚫린다. 물길이 열린다. 땅값이 오른다’(새누리당 안상수 후보)는 지역개발 공약으로 선거판은 쭈그러들었다. 선거의 진짜 승리자는 새누리당이 아니라 냉소였다. 대통령이 말하는 정치개혁, 사회개혁이 이런 것일까.



 무엇보다 당신은 살아 있는 자들의 힘을 간과했다. 선거가 끝나자 반격이 시작됐다. 수사 대상자 측근들은 알리바이를 주장하고 나섰다. “성완종씨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메모와 녹취록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수사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 당신의 기대대로 검찰이 기소를 하더라도 유죄 받기는 쉽지 않다. 대법원까지 제법 거칠고 긴 싸움이 이어질 것이다. 그 사이 그들은 남은 임기를 채울 수 있다.



 죽음으로 검찰 수사에 경종을 울리겠다는 당신 판단 역시 오산이다. 당신은 “검찰이 딜(deal·거래)을 하자고 했다”고 분노했지만 당신 이름이 붙은 리스트를 수사하면서 검찰엔 딜할 것들이 오히려 많아졌다. 검사 출신 변호사의 말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



 “한두 명 기소하고 수사가 끝나면 물론 비판 여론이 일겠지요. 하지만 앞으로 누가 검찰에 뭐라고 하겠습니까. ‘OOO의원이 성완종과 가까웠던 것 같던데’ 한마디만 나오면 다들 납작 엎드릴 테고…. 대선자금도 들여다보긴 할 겁니다. 수사요? 지금은 아니고, 내년이나 내후년에 다시 꺼내보지 않을까요.”



 결국 당신으로 인해 세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충격으로 흩어졌던 힘과 힘이 다시 뭉치고 있다. 권력관계도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깨끗한 정부가 돼야 한다”는 당신 주장과 달리 당신 사건이 먼저 깨끗하게 잊혀질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라. 죽은 자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그게 이승의 법칙이다. 망자에겐 변호사도 없다. 그러니 당신은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서 용기를 내 고백해야 했다.



 당신이 기여한 게 있다면 죽음만큼 그릇된 선택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또 하나를 꼽자면 무력감의 재확인이다.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막막함이 국정원 댓글, 세월호에 이어 당신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재연됐다.



 이제 시민들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진정한 정치개혁은 그들의 리그 안에서만 맴도는 뒷거래가 투명하게 공개될 때 가능한 것임을. 무력감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이 늘수록 변화의 에너지는 축적될 것이다. 그러고도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면…. 글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겠지.



권석천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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