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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5. 남자농구 선전

중앙일보 2005.12.22 18:39 종합 28면 지면보기
1970년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이던 한국선수단의 총감독을 맡았던 김성집씨(오른쪽)와 필자.
나는 1971년 7월 대한체육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체육회장 재임 중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각각 두 차례 치렀다. 64년 도쿄올림픽과 68년 멕시코올림픽, 66년과 70년 태국 방콕에서 잇따라 열린 아시안게임.


70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
4년 전 폭력사태 오점 씻어

아시아 2위 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 격투기 위주의 메달 경쟁 등은 86년 서울아시안게임 개최 때까지 한국 스포츠의 모습 그 자체였다.



첫 번째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태국과 금메달 수(12개)는 같았지만 은.동메달이 많아 종합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두 번째 대회에서는 태국보다 두 배가 많은 18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메달 박스인 권투는 변함없이 강했고, 육상과 수영에서도 금메달이 나왔다. 축구와 남자농구는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다. 한국 스포츠는 부단히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인 유망주를 발굴하고 태릉에 선수촌을 지어 집중훈련을 실시하며, 지도자 강습회를 통해 코치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한 나의 계획이 하나 하나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70년 아시안게임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우리 선수단의 단장 선임과 관련된 일이다. 당시 나는 대한체육회 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이었다. 스스로 단장이 될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을 단장으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나는 다른 분에게 단장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장 지휘관은 적임자가 따로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관리도 해야 했다. 그런데 장덕진 축구협회 회장과 내가 단장 자리를 놓고 경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나로서는 코웃음이 나올 밖에.



어느 날 장 회장이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내 집을 찾아왔다. 그는 "풍문에 들리는 단장 운동설은 주위 사람들이 말을 잘못 전했기 때문"이라며 사과했다. 솔직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젊은 패기로 선수단을 이끌어 주리라는 믿음이 갔다. 나는 장 회장을 아시안게임 선수단 단장으로 선임했다. 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통솔력 덕분에 우리 선수단은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게 국제전화를 해 그날 그날의 상황과 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용의주도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방콕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선전은 4년 전 한국과 태국의 남자농구 준결승전 때 발생한 폭력사태로 악화됐던 방콕 시민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180도 돌려 놓았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방콕에는 '한국인의 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정치인과 기업인, 해외동포들이 우리 선수단 숙소인 마노라호텔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정치인 박순천 여사는 선수들을 만나 "바로 선수 여러분이 말 없는 애국자"라며 눈물도 쏟았다. 이세호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우리는 반공 전선에서 싸워 이기겠다. 여러분은 스포츠 전선에서 선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선수단이 귀국한 70년 12월 22일. 김포공항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가에는 무려 100만 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다. 검붉게 탄 얼굴에 목에 메달을 걸고 개선한 우리 선수단은 20여 대의 오픈카에 나눠 타고 김포가도를 달렸다. 장 회장의 얼굴도 몰라 볼 정도로 검게 탔다. 서울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가 어렵던 그 시절, 국제대회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의 선전은 국민에게 더 없는 기쁨과 용기를 주었다. 우리 선수들이 어디에서 뛰든, 국민의 마음은 늘 그 곳에 있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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