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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정치자금 오디션 치르는 미 대선 후보들

중앙일보 2015.05.02 00:05 종합 26면 지면보기
이상복
워싱턴특파원
요즘 미국 정가의 관심 중 하나는 석유재벌 찰스·데이비드 코흐 형제의 돈을 누가 가져갈까 하는 거다. 포브스지가 선정한 전 세계 부자 순위 공동 6위에 나란히 올라 있는 이들은 최근 1조원의 정치자금을 풀겠다고 선언했다. 내년 대선에서 야당인 공화당 후보를 지원해 킹 메이커가 되겠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공화당의 ‘큰손’ 역할을 해온 이들이지만 정권 교체를 위해 통 큰 결단을 했다.



 하지만 코흐 형제가 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돈을 그냥 내줄 리 없다. 이번에 내건 조건은 오디션 통과다.



대선 후보들이 코흐 형제 앞에서 정책토론회를 열어 맘에 드는 순으로 정치자금을 제공받는 방식이다. 단 친절하게도 채점표를 미리 공개했다. 감세와 규제 완화 등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내놓는 후보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 후보를 고르겠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물러날 터인데 공화당 후보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되레 충성 경쟁 양상마저 보인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방송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코흐 형제를 욕하지만 난 존경한다.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지난달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만찬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중 누가 코흐 형제로부터 빨간 장미를 받을까요?”란 농담을 던졌다. 정치 후원금을 받으려고 정치인들이 앞다퉈 줄을 선 모양새를 비꼰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건 미국 정치가 갈수록 돈에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내년 대선 비용이 80조원을 넘어 역대 최고의 돈선거가 될 거라고 분석한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는 대선 출마 선언도 안 했는데 다음달이면 벌써 1000억원의 정치자금을 모을 거라고 한다.



실제로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하기도 힘들다.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상원의원 후보들은 평균 100억원 이상을 선거비용으로 지출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건 소액 기부자가 아니라 ‘수퍼 리치’들이다. 특혜와 비리는 여기서 싹트게 된다.



 미국 정치 하면 본받을 게 많다는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돈과 정치의 관계는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후보 지원 외곽 조직으로서 무제한적으로 선거자금을 받을 수 있는 ‘수퍼팩’이 그렇다.



수퍼팩은 명목상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갈수록 후보 캠프의 산하 조직이 돼 가고 있다. 자금 출처를 감추기 위해 편법도 횡행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공개 비판을 할 정도지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져 되돌리긴 어렵다. 이 점에서 돈과 정치에 관계된 정책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끌어가야 하고, 첫 단추를 신중하게 끼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대선 후보들이 정치자금을 받으려고 후원자 앞에서 오디션을 치르는 모습은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위기로 보인다.



이상복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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