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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필부들의 정치

중앙일보 2015.04.30 00:24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KBS 드라마 ‘징비록’ 21화(4월 25일 방영). 주인공 풍원부원군 류성룡이 선조를 향해 돌직구를 날렸다. “어찌 필부의 모습을 보이려 하시나이까.” 북진해 오는 왜군을 피해 의주까지 몽진한 임금이 명나라 땅인 요동으로 넘어가겠다고 ‘찌질한’ 소리를 하자 분노의 눈빛을 담아 일갈했다. 옆의 대신들도 “아니 되옵니다”를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대신들이 거침없이 들이대자 선조가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혼절하기 일보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신하들은 어의를 부르지 않았다.



 류성룡은 하늘 같은 임금을 정말 ‘필부’에 비유했을까. 그러고도 목이 달아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인가. 국역 조선왕조실록을 보니 ‘필부’ 발언은 있었다. 하지만 그 주체가 류성룡인지는 알 수 없다.



 선조는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 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획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선조 27권, 25년 6월 24일). 사관은 누구의 말인지 명확히 기술하지 않은 채 ‘대신들이’라고 적어 놓았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필부’ 발언을 한 이가 좌의정 윤두수 또는 비변사당상 신잡일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그런 말을 듣고서도 망명의 기회를 계속 노렸다. 이틀 뒤 “요동으로 넘어오면 관전보(요동 변방 지역)의 빈 관아에 머물게 하라”는 명나라 만력제의 지시가 있었다는 전갈을 받고서야 뜻을 접었다. 따지고 보면 ‘필부’ 발언은 임금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백성에 대한 모독이다. 왕과 귀족이 버리고 간 땅을 목숨 바쳐 지켜낸 것은 의병에 합류한 무명씨들이었다.



 대통령은 28일 지금의 혼란한 상황이 과거 정권에서 고 성완종씨에 대한 특혜성 사면을 했기 때문인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분란을 가라앉히지도, 진짜 중요한 국가적 과제 해결로 국민의 마음을 모으지도 못했다. 야당 대표는 “이번 사건은 대통령 자신이 (의혹의) 몸통”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여당 대표는 “(야당 대표가) 조금 정신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경제난, 외교 고립 우려 등의 난국을 타개할 리더십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어찌 필부의 모습을 보이려 하시나이까.” 드라마 속 서애 대감의 절규는 현재형이다. 지금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나라를 걱정한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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