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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2. 아시안게임 유치<하>

중앙일보 2005.12.20 18:23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종필(오른쪽) 공화당 의장이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은 필자.
1967년 6월. '대외비'라는 도장이 찍힌 대통령의 특별지시서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과 대한체육회장 앞으로 전달됐다.


북한 무장간첩 침투 ‘1·21 사태’
명분 내세워 대회 개최권 반납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완수를 위해 비생산적인 투자를 할 수 없으니 70년도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 개최는 포기하라."



공화당에서도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11월 23일 마라톤 훈련용 차량을 전달하기 위해 태릉선수촌에 들러 "아시아대회를 경제 건설과 스포츠 수준 향상이 이루어진 70년 이후에 개최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길은 정해졌다. 문제는 어떤 명분으로 대회를 반납하며 대회 개최권을 어느 나라로 넘기느냐 하는 데 있었다.



대회 반납이 불가피해지자 유치 활동을 할 때는 그토록 활발하던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반납 문제를 다루려던 10월 21일의 KOC 상임위원회는 정족수 미달로 유회됐다. 11월 8일에는 문교부가 반납을 독촉했다. 누군가 '총대'를 메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니 남은 사람은 나와 장기영 KOC 위원장뿐이었다. 나는 사실 대회 유치 과정에서 소외된 면이 있었다. 유감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감정이 아니라 우리 스포츠, 나아가 나라의 일이었다. 나는 한 점 사심도 없이 뛰기로 했다.



당시 국내 스포츠계에는 단체 간 갈등 원인을 일소하고 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대한체육회.KOC와 학교 체육회의 조직 통합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68년 3월 1일 나는 통합 체육회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도쿄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체육회장의 중책을 맡았듯이 나는 또 한번 아시안게임 개최권 반납의 십자가를 져야 했다. 어차피 대한민국 스포츠의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추락했지만 반납에도 명분은 필요했다. 나는 3월 22일 상임이사회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허장성세의 위신에 집념하는 것이 북한의 격화된 침략적 도발행위에 직면한 한국의 장기 경제개발 계획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우선적으로 국내 스포츠의 대중화와 경기 수준의 향상, 그리고 시설의 점진적인 개선 확장에 동원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제6회 서울대회 개최를 포기하고 그 개최권을 다른 회원국에 이양하게 되었다."



'1.21 사태'가 터진 뒤여서 북한의 위협을 전면에 내세운 이 성명은 설득력이 있었다. 1.21 사태란 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 간첩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한 사건이다. 명분 확보에 성공한 나는 일본.필리핀 등에 개최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4월 30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 집행위원회는 우리의 다급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의 위협을 규탄하면서도 서울 개최를 주장했다.



하루 뒤인 5월 1일 13개국 33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AGF 총회가 열렸다. 여기서 태국이 아시안게임을 한 번 더 개최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태국 정부는 7월 2일 AGF 회원국이 경비 67만 달러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대회 개최를 수락했다. 마침내 임무를 완수한 나는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아시아대회 유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 대회를 무난히 치를 수 있는 여건과 실력이 있느냐가 문제"라고 한 고 이상백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불현듯 그의 혜안이, 따뜻한 음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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