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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상품권으로 전락한 사면권

중앙일보 2015.04.29 00:05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 진
논설위원
대통령의 사면권은 국가의 형벌권에 피해를 준다. 검찰과 법원이 범죄를 징벌했는데 대통령이 이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국가에 피해보다 이익이 되도록 사면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이를 견제해야 한다. 미국에선 검찰이 수사의 칼날을 들이댔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1년 1월 20일 퇴임했다. 바로 그날 클린턴은 100여 명을 사면했다. 이복동생 로저 클린턴도 포함됐는데 그는 마약소지 혐의로 복역 중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논란은 석유재벌 마크 리치(Marc Rich·1934~2013)였다. 리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검은돈의 사업가’였다.



 리치는 벨기에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리치의 아버지는 1941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현물거래로 큰돈을 벌었다. 리치는 아버지의 수완을 배웠고 자신의 사업을 개척했다. 당시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큰돈을 들여 장기계약에 따라 석유를 채굴해서 팔았다. 반면 리치는 작은 돈으로 현물 석유를 신속히 거래했다.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



 돈만 된다면 리치는 독재정권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권, 쿠바 카스트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칠레 피노체트···. 심지어는 79년 미국인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도 이란 정권과 거래했다. 미국 정부의 금수(禁輸) 조치를 무시하면서 그는 이란 석유를 사주었던 것이다. 리치의 거래는 조국에는 이적(利敵) 행위였다. 비난이 거세도 그는 응수했다. “나는 사업가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그를 노려보고 있던 검찰은 83년 그를 기소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탈세 혐의였다. 유죄가 되면 리치는 종신형을 살아야 했다. 기소의 낌새를 알아채고 리치는 스위스로 도피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10대 도주범’에 올렸다.



 그런 리치를 클린턴은 배짱 좋게 사면한 것이다. 물론 미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리치의 전 부인 데니스가 클린턴 주변에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드러났다. 데니스는 민주당에 100만 달러 그리고 클린턴 기념관에 45만 달러를 냈다. 연방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하원도 청문회를 열고 클린턴 보좌관들을 소환했다. 존 포데스타 비서실장을 비롯한 백악관 참모들은 “거의 모든 보좌진이 사면을 해주지 말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클린턴은 보좌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면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검찰수사와 의회조사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사면을 요청한 주요 세력은 이스라엘이었다. 에후드 바라크 총리와 2명의 전직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 책임자가 ‘사면 청원 작전’을 벌였다. 이스라엘에 리치는 일등 공신이었다. 그는 막대한 자금과 국제적인 영향력을 이용해 모사드를 도왔다. 비밀 파이프를 통해 이란 원유를 이스라엘에 대주기도 했다. 수사 착수 6개월 후 검찰은 리치 사면에서 불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며 수사를 종결했다.



 리치 사면은 미국인에게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러나 논란의 차원이 다르다. 리치 사면에는 적어도 전임·후임 정권의 수상한 거래는 없었다. 리치 부인이 정치자금을 기부했지만 이스라엘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사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사면 파동에는 그래도 국가 간의 거래라는 ‘국익(國益)의 드라마’가 있다. 그리고 국익이든 뭐든 일단 파헤쳐보겠다는 ‘원칙의 드라마’가 있다.



 2002년 12월 퇴임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은 75명을 사면했다. 여기에 국익이나 원칙 따위는 없다. 사면은 세 종류였다. 전임 김대중 정권에 대한 ‘채무변제’, 측근을 봐준 특혜, 후임 이명박 정권과 주고받은 거래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부담을 덜려고 노 대통령은 신건·임동원 같은 도청 범죄자까지 사면했다. 역시 사면된 최도술씨는 2002년 불법 대선자금으로 노무현 후보가 개인 빚을 갚도록 도와준 측근이다.



 노 대통령은 재임 중 형님 건평씨의 비리로 시달렸다. 그는 다음 정권에서도 형님 비리가 드러날까 걱정했다. 노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에서 부탁하는 사면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걱정대로 그가 퇴임한 지 1년도 못 돼 형님은 감옥에 갔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후 이명박 대통령은 건평씨를 사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 대선 때 거액을 받았다는 ‘자살 폭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사실을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못지않게 성완종 사면 의혹도 중요한 것이다. 2002년 12월 이 나라 청와대에선 신성한 사면권이 시장의 상품권으로 추락했다. 클린턴의 사면 스캔들은 검찰 수사와 의회 조사로 진상이 밝혀졌다. 그런데 성완종 사면은 안갯속에 있다. 국정조사든 검찰 수사든 그 저급한 거래의 진상을 파헤쳐야 한다.



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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