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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발레, 할수록 욕심나요

중앙선데이 2015.04.25 17:04 424호 16면 지면보기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나비처럼 사뿐사뿐~. ‘발레’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다. 15일 국립발레단 연습실 풍경은 사뭇 달랐다. 김지영, 이은원, 신승원 등 주역 무용수들이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쭉 내민 채 마루가 무너져라 쿵! 쿵! 스텝을 밟고 있었다. 신작 ‘말괄량이 길들이기’(29일~5월 3일 예술의전당)의 천방지축 구제불능 여주인공 카타리나에 빙의하기 위해서다. 상대역 페트루키오를 맡은 남자무용수들도 머리와 수염을 기른 부스스한 모습으로 마초 스타일에 적응중이었다.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주역 이동훈·신승원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비극이 주류인 발레 세상에서 보기 드문 희극이다. ‘오네긴’의 안무가 존 크랑코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춤으로 옮긴 ‘20세기 대표 코미디 발레’다. 2006년 강수진의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내한공연 이래 처음 만나는 무대로, 국립발레단이 아시아 최초로 판권을 따왔다.

‘드라마 발레의 완성자’로 불리는 크랑코의 안무 중에서도 고도의 테크닉과 내적 심리 묘사까지 요구하는 까다로운 작품이다. 슈투트가르트 오리지널 무대의 주역인 강수진 예술감독과 필립 바란키에비츠가 밀착 지도하고 있지만, 워낙 독특한 스타일인 만큼 최고의 발레리나 김지영도 “어렵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 낯선 무대에서 우리 무용수들은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카타리나-페트루키오’로 첫 커플 연기에 도전하는 주역 무용수 신승원(29)과 이동훈(29)을 만났다.

“제 안에 있었나봐요. 처음엔 저걸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빠져들수록 안에 있었던 걸 느껴요.”(신) “아냐 넌 평상시가 그래.(웃음)”(이)
이미 두 사람은 역할에 푹 빠져 있었다. 무릎 부상으로 11개월 만에 복귀한 수석 무용수 이동훈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정말 재미있다”고 했다. 2009년 입단 이래 신인 등용문인 ‘호두까기 인형’을 제외한 큰 무대 여주인공을 처음 맡은 솔리스트 신승원도 가녀린 외모와 달리 강한 의욕과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처음 만나는 독특한 코미디 작품인데.
신: 안 해 본거라 재밌고도 어려워요. 파드되를 10분 하면 그 안에 감정선이 변화무쌍하거든요. 변덕스런 여자의 감정 변화를 어떨 땐 눈으로만, 어떨 땐 몸도 같이 빠르게 보여주는 표현이 생소하긴 한데 재미있어서 욕심이 많이 나요.
이: 어렸을 때 ‘그랑디바’란 코믹 발레를 보고 발레가 이렇게 웃길 수 있구나 싶었는데 막상 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항상 멋진 역할만 했죠. 자연스러운 표현을 늘 해보고 싶었는데 표출하니까 너무 재밌어요. 인위적으로 만들면 어색해지기 쉬운데 다행히 제가 생각하는 방향을 필립이 맞다고 해주시네요.

‘돈키호테’도 희극발레인데 많이 다른가요.
이: 돈키호테가 발레 동작 속에서 코믹연기를 한다면 이 작품은 연기 속에 발레 동작을 하는거죠. 무용수가 춤만 추면 되는 게 아니라 연기를 못 하면 그냥 끝나요.
신: 연극적 요소가 많아서 무용수끼리 대화가 돼야 하거든요. 극을 이끌어야 되는 주인공은 의사소통에 신경을 더 써야 하죠. 액션·리액션을 매끄럽게 잘 전달하려고 노력중이에요.

코믹 사진 찍을 땐 걱정됐지만 속시원해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거칠고 난폭한 성격 탓에 아무도 접근 못하는 카타리나에게 낯선 남자 페트루키오가 나타나 한층 더 난폭하게 그녀를 길들인다는 내용. 우아한 왕자, 공주의 사랑이 아니라 난폭한 여자와 한 술 더 뜨는 남자의 사랑이다 보니 남녀 주인공이 싸우는 와중에 넘어지고 자빠지며 ‘잘 망가져야’ 사는 작품이다. 너무 망가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니 대표적인 꽃미남 발레리노로 통하는 이동훈은 “예전부터 망가질 준비가 늘 돼 있었다”고 응수한다.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니까, 처음부터 망가짐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우스꽝스런 사진 찍을 때는 이미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속시원하죠.(웃음)”(이)
“카타리나가 처음엔 통제가 불가능하잖아요. 침도 뱉고 때리는 장면도 있는데 하다 보니 은근히 스트레스가 풀리더라고요. 다른 카타리나들도 비슷하대요.”(신)
“제 안에 잊고 있던 걸 생각나게 해요. 현실에선 남자 무용수들이 여자들을 떠받들잖아요. 이 작품은 길들이는 과정이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요. 남자답게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하하. 농담입니다.”(이)
여자를 길들인다니 시대착오적인 내용 아니냐는 물음에 신승원은 “길들여진다기 보다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원래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는 성격이었는데 사랑이란 감정을 알게 되니 흔들리는 거죠. 천방지축이지만 표현이 서툴러 거칠어보일 뿐 원래 정 많고 순수한 여자거든요. 그걸 잘 다듬어주니 본성이 드러나 현모양처가 되는 거겠죠.”(신)
“억지로 동물 길들이는 느낌이 아니니까요. 얘가 원래 갖고 있는 걸 꺼내주는 거죠. 보이는 게 다가 아니잖아요. 속을 꿰뚫어본 남자가 겉에서 속을 꺼내주는 이야기예요.”(이)

발레 스토리는 대체로 여자들에게 불리한 것 같아요.
이: 저희 입장에서는 아니죠. 발레는 다 여자가 주인공이잖아요.
신: 실제로는 남자가 다 들어주고 받쳐주고 하니까 공평한 것 같아요.(웃음)

존 크랑코의 작품은 처음인데 어떤가요.
이: 안무가마다 특징이 있는데 존 크랑코 파드되는 굉장히 난해해요. 클래식 발레를 많이 벗어나 있되 지킬 건 지켜야 해서 어렵죠. 그런데 일단 감을 잡으니 길이 뚫리더라고요.
신: 이 작품은 타이밍과 호흡이 중요해요. 클래식은 축을 중심으로 하는데 존 크랑코는 축에서 벗어나는 게 많아서 밀고 당기고 들고 들리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하니 파트너와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죠. 만일 둘이 연습하다 동훈이 아프다고 다른 파트너가 대신 연습해줄 수 없어요. 그게 너무 달라요. 필립이 베테랑이지만 만일 필립이랑 갑자기 하게 된다면 무대에서 실수할걸요.

고도의 테크닉을 요한다던데.
이: 늘 해왔던 게 없고 다 새로워요. 남자 메인 솔로에 공중 3회전이 있는데, 우리끼리 장난으로 해보긴 했지만 실제 세 바퀴 도는 게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그 옛날 비디오에도 세 바퀴를 도는데 깜짝 놀랐어요. 크랑코가 많이 앞서간 사람이구나 깨달았죠. 동작 자체가 어렵지는 않아요. 힘든 건 상체와 하체가 따로 잘 놀아야 되는 거죠. 다리가 힘들어도 상체는 행복한 연기를 해야되는데, 잘못하면 행사장 풍선처럼 이상해질 수 있죠.
신: 파드되 중에 배고파 하는 장면이 있어요. 배고프니 힘이 없어야 되는데 몸은 잡고 있어야 하죠. 몸은 잡고 있으면서 풀려 보이는 연기를 해야되니 모순이잖아요. 그 부분이 가장 힘들고 어색하죠.
이: 맞아요. 이 작품이 힘든 게 미묘한 타이밍이 안 맞으면 바로 어색해진다는 거에요. 동작이 다 새로운 와중에 마임과 발레동작의 컴비네이션이 정확해야 하니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죠.

명장면이 있죠.
이: 1막 ‘싸움’ 파드되가 가장 재미있죠.
신: 처음엔 짜증내다가 파드되를 추면서 흔들리고 좋아지는 감정 변화가 한 씬에서 다 이뤄지거든요. 감정 표현을 보는 재미가 있을 거에요. 저희도 에너지를 가장 많이 써요. 자연스럽게 하면서 에너지는 표출해야 되고 그러다 발레동작도 해야 되니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끝까지 못했어요.

이 작품만의 매력이라면.
이: 다른 작품이 발레동작 틀 안에 있다면 이 작품은 현실로 나와 자연스럽고 리얼한 느낌이에요. 문외한도 이해할 수 있게 마임을 짜 놓아서 보기에도 쉽고, 안무 자체가 유머러스해서 전공자들로서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죠.
신: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로 할 수 있는 점이요. 단장님이 조언을 해 주시지만 꼭 지켜야 하는 안무 외에는 저희만의 색깔로 자유롭게 하라고 하세요. 자기 표현이 가능한 게 크랑코 작품의 매력인 것 같아요.

길들여진다기보다 사랑 배우는 이야기
이동훈은 지난해 부상 전엔 늘 간판스타 김지영과 호흡을 맞춰 왔다. 복귀 이후 파트너가 바뀌어 “의도치 않게 누나를 졸업하게 된 거 같다”는 그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스쳤다.
“누나의 소중함과 가르침의 감사함이 크게 느껴져요. 누나한테 정말 힘들게 4년 동안 파트너링을 배웠거든요. 누나랑 할 때는 등에 손만 대도 누나 힘든지 알고, 누나 숨소리만 들어도 이제 누나 쉬게 해줘야지 이런 게 몸에 배어있었죠. 누나랑 가장 잘 맞는 게 음악 들을 때 감정선이었는데 파트너가 바뀌니 그게 잘 안 맞아 힘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누나가 그리웠고 지금도 그립지만, 워낙 승원이도 감정 표현이 좋아서 주고받으며 적응돼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승원이는 가장 가볍거든요. 다들 부러워하죠.(웃음)”

두 사람이 본 공연 커플은 처음이죠.
신: 예전에 ‘호두까기 인형’ 지방공연 때 제 파트너가 급성간염에 걸려 동훈이 짠하고 나타났어요. 정말 연습을 단 한 번도 못하고 무대에 섰는데 너무 잘 맞았죠. 하면서도 ‘이건 뭐지?’ 싶고, 당시 최태지 단장님을 비롯해 다들 깜짝 놀랐었어요.
이: 맞춰보질 못했으니 더 집중되고 서로 배려하다 보니 감정선도 잘 살았던 것 같아요.
이동훈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승원에 대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워낙 유명했다”고 추켜세웠다. “남자 무용수밖에 관심없던 제가 알 정도로 잘했어요. 학생 때부터 프로페셔널 한 느낌이었죠. 춤은 흡인력이 중요한데, 체격도 작고 핸디캡이 있지만 잘 숨기면서 캐릭터 표현하는 게 다른 무용수보다 월등한 것 같아요.”
지난해 ‘교향곡 7번’과 ‘봄의 제전’에 이례적으로 동시에 발탁되는 등 전성기를 맞고 있는 신승원도 최고 스타인 이동훈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단다. “춤출 때는 그런 거 없어요. 다른 작품에서 저랑 안 만날 때는 대단하다 인정해요. 몸의 감각도 뛰어나고, 음악성도 타고났죠. 지난번 ‘지젤’ 때도 너무 놀랍고 멋진 복귀였지만,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다음 공연을 나랑 한다면 나도 그만하다고 생각해요. 춤은 자신감으로 추는 거잖아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na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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