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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부정은 '계산된 도발' … 혐한 정서 키워 개헌 노린다

중앙일보 2015.04.22 02:30 종합 12면 지면보기
아베 정권 출범 1년이 되던 2013년 12월 26일 오전 11시30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돌연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했다. 그런데 실은 이날 오전 일본 정권 내부에선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가 수면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총리 관저 내 관방장관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이 머리를 맞댔다. 테마는 교과서 검정. 시모무라 장관이 말을 꺼냈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명칭)나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어떻게든 교과서에 확실히 굳혀놓아야 하겠는데…. 나머지는 발표 타이밍인데, 어떻게 할까요.”

 ‘중·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기존 방침을 뒤집기 위한 작전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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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다 외상이 말을 꺼냈다. “한국이나 중국이 설 연휴에 들어가는 1월 말 직전이 어떨까요.” ‘김빼기’ 작전이었다. 미국과의 협의도 거쳤다.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그리고 아베 정권은 설 연휴 이틀 전인 1월 28일 ‘독도=일본 고유영토, 한국이 불법점거’ 방침을 명시한 해설서 개정을 전격 발표했다.

 그 결과는 1년3개월이 지난 올 4월 6일 발표된 교과서 검정 결과(사회 교과 18종 중 18종에 독도 영유권 주장)에 100% 반영돼 나타났다.

 도대체 아베 총리가 꿈꾸는 ‘일본의 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아베는 전후 70년을 맞은 올해를 그가 입버릇처럼 되뇌어온 전후 레짐(regime·체제)에서 벗어나는 분수령의 해로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걸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 맹렬하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3년 5월 12일 도호쿠(東北) 대지진 피해지역을 방문해 ‘731’이 새겨진 전투 훈련기에 올라 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731’은 2차대전 당시 한국인 등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했던 일본 관동군의 세균전 부대(일명 731부대)를 연상시켰다. [중앙포토]
 ‘아베 플랜’의 3대 지향점은 ‘역사 뒤집기’ ‘평화헌법 뒤집기’ ‘대(對)중국 연합 구축’이다.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는 “앞으로 이어질 일련의 연설과 담화(반둥회의-미국 양원-아베 담화)를 통해 미국 등 국제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최종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일 정부가 8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 방문을 추진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전후 70년간 따라붙던 ‘전쟁을 일으킨 나라’란 꼬리표를 확실하게 떼어내겠다는 심산이다. 일종의 ‘리셋(Reset)’ 버튼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도쿄재판 부정 등 사상적으론 반미 성향이 강한 아베지만 자신의 ‘일본 개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일본의 외교 소식통은 “미국 반응은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설령 올해가 힘들더라도 내년까지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성사시키겠다는 것이 일 정부의 분명한 입장”이라고 말했다.

 아베의 역사 뒤집기는 미국이 눈앞의 불인 군사비 부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각종 아시아·태평양 정책을 감안했을 때 결국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에 ‘소극적 비판’에 그칠 것이란 자신감의 발로다. 최근 미 정부 관료들의 잇따른 ‘아베 옹호’ 발언도 이를 부추겼다. 일본의 커진 입김에 미국도 당초 이달 말 발표 예정인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에서 ‘미국에 의한 핵 억지력 유지’란 표현을 다소 완화하기로 했다.

아베 총리가 2013년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주변국들의 비난을 받았다. [중앙포토]
 아베의 각종 역사·외교 도발은 아베의 염원인 헌법개정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미우라 마리(三浦まり·정치학) 조치(上智)대 교수는 “▶침략전쟁 부정 ▶위안부 강제성 부인 ▶외교청서에서 한국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 표현 삭제 등 일련의 모든 행위는 실은 한국·중국의 반발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려는 목적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한·중이 반발할수록 일본 내에서 ‘두 나라는 뭘 해도 트집을 잡는 나라다. 그들과 같이할 수 없으니 일본이 군사적으로도 독자적인 힘을 갖춰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지는 걸 이용해 개헌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한·일이 다투는 사이 일본 내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는 국민의 여론은 최근 1년간 20%대에서 30%대 중반으로 껑충 뛰었다.

 내년 8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뒤 ‘중·참의원 발의’(3분의 2 이상 필요)→‘국민투표 실시’로 몰아가려는 아베로선 아직 갈 길이 멀다. 미우라 교수는 “일본 내 내셔널리즘의 대두는 이 같은 치밀한 계산 속에 이뤄지고 있다”며 “아베 정권은 국민 과반수 찬성이란 높은 벽을 넘기 위해 계속 한국·중국과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郞·정치학) 호세이(法政)대 교수는 “이런 비상식이 통하는 정치를 만든 것 자체가 창피하고 불행하고, 또 학문적 연구 대상감”이라고 말했다.

 아베 정권의 이 같은 뜻을 받들어 ‘표’를 다지고 있는 게 일본 내 최대 우익조직인 ‘일본회의’다. 일본회의는 2018년까지 개헌을 이뤄내기 위해 ‘헌법개정을 실현하는 1000만 명 네트워크 운동’을 전국에서 전개 중이다. 거의 매주 주말 전국에서 “어렵게 돌아온 개헌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3000만 표가 필요하다”는 구호를 외치며 여론몰이 집회를 개최 중이다. 우치다 교수는 “일련의 과정은 우파 국회의원들을 포섭 내지 육성해 온 일본회의가 오랜 세월 짜 놓은 플랜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정권이 향후 국가외교의 방향을 ‘두루 친하게’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전환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무라 간(木村幹·비교정치학) 고베대 교수는 “아베 정권은 사실상 향후 아시아 구도를 ‘미·일·호주·인도 4개국 연합 대 중국’으로 보고 그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쪽으로 방향성을 굳혔다”고 말했다.

 한국은 일본이 아무리 접근해도 중국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에 연합 세력에 넣어봐야 오히려 거치적거릴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쓸 여력이 있으면 호주와 인도에 쏟겠다는 게 아베 정권의 확고한 뜻”이라고 해석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 속에서 동아시아에선 호주, 서아시아에선 인도와 손잡는 ‘대중국 연합’을 구축하면 중국 견제의 선봉으로서 ‘대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아베는 미국이 이 같은 대립구도를 결코 원치 않으리란 걸 잘 안다. 하지만 결국은 미국의 ‘군사 파트너’이자 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교두보 역할을 굳힌 일본의 의향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란 ‘근거 있는 자만’에 가득 차 있단 분석이다.

 역사 뒤집기, 평화헌법 뒤집기, 대립각 구도 굳히기를 향해 전략·전술·작전이 치밀하게 돌아가는 ‘아베의 일본’은 이제 우리에게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분명한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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