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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문맹' 탈북자들, 투자 사기에 운다

중앙일보 2015.04.21 01:28 종합 10면 지면보기
2007년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김모(33)씨는 지난해 3월 이른바 ‘한성무역 사기 사건’에 휘말려 정착지원금 등 1억원을 날렸다. 한성무역 사건은 회사 대표 한모(50)씨가 직원과 귀환국군용사회 회원, 탈북자 등 400여 명에게 “매달 수익금을 보장해 주겠다”고 속인 뒤 100억원대의 투자금을 받아 잠적한 사건이다. 그 일로 김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던 여자 친구와도 파혼했다. 서울 노원경찰서가 수사해 검찰로 송치했지만 한씨가 잠적하면서 기소 중지된 상태다. 김씨는 “피해자들 가운데 자살을 시도한 탈북자도 있다. 탈북자들은 투자나 주식 같은 금융 지식이 많지 않아 쉽게 사기를 당한다”고 말했다.


은행 거래 않고 금융지식 부족해
‘수익금 보장’ 말에 쉽게 현혹
“수십억 다단계 금융사기 당했다”
피해자 100여 명 … 고소 잇따라

 이런 가운데 탈북자 사회가 금융사기 문제로 또다시 술렁이고 있다. 이달 초 탈북자 10여 명이 H 사회적 기업의 김모 대표를 사기 혐의로 잇따라 고소하면서다. 일각에선 ‘제2의 한성무역 사건’으로 번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탈북어버이연합 김미화 회장은 “김 대표가 투자자를 데려오면 투자금의 10%에 이르는 인센티브를 준다며 다단계 영업을 했다”며 “금융에 무지한 70~80대 탈북 노인들에게 차용증 한 장 써주고 높은 수익금을 준다고 속여 탈북자 100여 명이 수십억원의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회사 상황이 안 좋아져 지난 1월 14일 이후로 원금과 이자 지급을 멈췄을 뿐”이라며 “오는 7월부터는 이자를 다시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탈북자 중엔 은행 거래 등에 익숙지 않고 금융 지식이 부족한 ‘금융 문맹’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이 사기 사건에 휘말리는 이유다. 실제로 차용증 한 장만 받고 김 대표에게 4000만원을 투자한 탈북자 김병주(59·여)씨는 “차용증은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쳐주는 종이’로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장인숙(70)씨는 “‘회사가 망하면 자기들이 다 책임진다’고 뜻하는 증서가 차용증인 줄 알았다”고 했다. 탈북자 김모씨는 “시중은행보다 높은 고금리의 위험성을 이해하는 탈북자는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탈북자 단체들은 탈북자 대상 사기가 잇따르는 원인을 금융·경제 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정착하기 전 통일부 소속 하나원에서 12주 동안 기본교육을 받는데 금융 관련 교육 시간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하나원 수료 후 지역별 하나센터에서 경제 교육을 받는데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은 많지 않다고 한다. 하나센터 관계자는 “금융사기 방지 같은 교육은 따로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탈북자들끼리 잘못된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사기를 당하는 주원인이 된다. 한성무역 사건 피해자 김씨는 “탈북자들은 경제 문제를 상담할 곳이 없다”며 “탈북자 사회에선 목소리 큰 사람들의 정보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장인숙씨 역시 “우리는 투자할 때 서로 알음알음 평판에 의지한다”고 했다. 그릇된 정보로 서로 투자를 권유하고 함께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법률구조공단의 금융 관련 상담 건수는 지난 5년간 5건에 불과하다. 경찰청 보안국 관계자는 “탈북자들은 생계에 바빠 금융 교육을 해도 참여율이 저조한 편”이라며 “탈북자 금융 교육을 의무화하고 탈북자 경제 교육을 하는 전문 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승기·임지수 기자 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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