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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화요일] '가상현실 저널리즘'도 언론인가

중앙일보 2015.04.21 00:51 종합 20면 지면보기
저널리즘이 점점 생생해지고 있다. LED 센서와 모니터, 헤드폰이 연결된 새로운 디바이스 덕분이다. ‘프로젝트 시리아’는 시리아 주택가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를 다뤘다. 테러 현장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내전의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엠블리마틱·나이트 재단 제공]


이곳은 시리아의 주택가. 열 살쯤 돼 보이는, 흰옷 입은 검은 눈동자의 소녀가 거리에 서서 아랍어로 노래한다. 낭랑한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다른 몇 명도 소녀 주위에 모여 섰다. 갑자기 ‘펑’ 하는 폭발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데 눈앞에서 소녀가 뒤로 날아갔다. 사람들이 질러대는 비명과 희뿌연 먼지 속에 뒷걸음치다 보니 젊은 남자가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다. 축 늘어진 그의 두 다리에 경련이 인다. ‘안 돼’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어디를 봐도 안전한 곳은 없다.

눈앞에서 폭탄 맞는 시리아 소녀
가상현실 체험자들 “안 돼!”



 LED센서와 모니터, 헤드폰이 연결된 기기를 벗자 현실로 돌아왔다. 차례를 기다리는 다음 기자에게 기기를 넘기고 돌아서는데 시선이 절로 발 아래로 향했다. 지금 발 딛고 선 곳은 국제 온라인저널리즘세미나(ISOJ)가 열린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텍사스대학이다. 안도감과 무력감이 동시에 찾아온다.



 지난 19일(현지시간) 체험한 3차원(3D) 가상현실 ‘프로젝트 시리아’는 텍사스에 모인 기자들을 로켓 폭탄이 떨어지는 시리아 내전 한복판으로 데려갔다. 최근 언론계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저널리즘’이다.







 지난 18~19일 전 세계 유력 언론 기자들이 모여 디지털 뉴스의 미래를 논한 ISOJ의 올해 최대 이슈는 가상현실(VR) 저널리즘이었다. 3D 영상을 보여주는 가상현실 기기를 착용하면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사건 현장에 있는 것처럼 소리와 3차원 공간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한다. 착용한 기기 속에 3D 입체 영상이 펼쳐질 뿐 아니라 실제로 걸음을 옮겨 영상 속 인물에게 다가가고, 몸을 굽혀 눈을 맞출 수도 있다. 360도 영상이 구현돼 있어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고, 몸을 돌려 등 뒤의 장면도 볼 수 있다.



실감형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만든 3D 동영상. 팩트와 다른 내용이 담길 수 있다는 게 문제다.
 ‘프로젝트 시리아’의 제작사인 엠블리마틱이 ISOJ 강연장 옆에 차린 체험관은 행사 내내 기자와 언론학자들로 북적댔다. 가상현실 기기를 쓰고 센서 5대가 둘러싼 21㎡ 공간 안에 들어가 시리아를 체험하기 위해서다. 조슈아 벤튼 미국 하버드대 니먼 저널리즘연구소 소장은 “이번 콘퍼런스에 참석하고 있노라면 올해 말쯤이면 모든 저널리즘은 드론과 가상현실로 이뤄질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트윗을 올렸다. 에밀리오 가르시아 루이스 워싱턴포스트 디지털 국장은 “다들 가상현실 저널리즘 체험장에 꼭 들러보라”고 했다.



 엠블리마틱 창업자 노니 데라페냐(52·여)는 19일 ISOJ 주제 강연에서 “모든 훌륭한 이야기는 독자를 그곳으로 데려가기 마련”이라며 “가상현실 저널리즘이 독자의 몰입을 유도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저널리즘의 대모’로 꼽히는 데라페냐는 하버드대에서 영상예술을 전공하고 뉴스위크 특파원, 다큐멘터리 작가 등을 거친 자신을 ‘정통 언론인’으로 소개했다.



 데라페냐는 지난해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도 ‘프로젝트 시리아’ 등 3D 영상을 선보였다. 어떤 이는 영상 체험을 끝내고 눈물을 흘렸다. 2010년 멕시코 불법체류자가 미국 경찰 10여 명에게 폭행당해 죽은 사건을 재현한 ‘폭력의 사용’ 영상을 보면서 “그만 때려요” “저항도 안 하잖아요”라고 가상현실 속 경찰에게 외치는 이도 있었다.



 ‘폭력의 사용’에는 실제 현장에서 녹취된 피해자의 신음소리가 나온다. 현실이 담겼기에 독자는 몰입한다. 하지만 순수한 ‘현실’은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3D 영상 내에 포함될 수 있고, 주장이 엇갈리는 경우에도 반론을 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라페냐의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는 “만들어진 현실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 않는가” “맥락을 어떻게 제대로 담을 것인가”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데라페냐는 “사람들이 이슈의 단면만을 보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위험이 있다”면서도 “가상현실이 아니더라도, 독자는 원래 좋은 기사에 큰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ISOJ에 참석한 한국 취재진은 데라페냐와 별도의 인터뷰를 가졌다. 데라페냐는 “사람들이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한다는 것은 과도한 우려”라며 “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한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하는 가상현실 저널리즘은 전통적 뉴스를 보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018년까지 전 세계 2500만 명이 가상현실 기기를 갖게 될 것”이라며 “가상현실 뉴스룸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이 오큘러스를 인수하는 등 계속 가상현실에 투자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있어,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가상현실 기기의 대중화도 신속하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오큘러스는 가상현실 기기 제작업체로, 지난해 페이스북이 2조5000억원에 인수했다. 이번 ISOJ 가상현실 체험관에는 오큘러스 기기도 놓여 있었다.



 또 다른 논란은 가상현실 기기의 사용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다. 3D 화면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뇌와 신경, 시각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기기를 착용하고 가상현실 뉴스 영상 3편을 5분 정도 연달아 보고 나니 머리가 울리고 메스꺼웠다. 두통은 4~5시간 지속됐다. 데라페냐 역시 “가상현실 저널리즘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지만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는 있다”고 말했다.



  오스틴(미국 텍사스)=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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