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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으로 들어가야 무형문화재가 살지요

중앙일보 2015.04.17 00:55 종합 21면 지면보기
‘활인대’와 ‘밤마리 오광대’의 존재를 지역민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1983년 ‘대야문화제’의 가장행렬. ‘할미·영감’ 과장 중 할미탈을 쓴 연희자가 해학적인 놀이판을 펼치고 있다. [사진 이훈상]


무형문화재는 늘 국가의 재정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전수되어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일까. 민속예술은 지역사회 현장에서 이웃과 함께하며 능동적 선도체로 기능할 수 없는가. 민속학자들이 고민해온 논쟁거리 중 하나다.

8세기 ‘활인대와 밤마리 오광대’
이훈상 교수, 민속예술혼 재평가



 최근 이훈상(61) 동아대 사학과 교수 등이 공동 연구한 ‘합천 밤마리 오광대’의 사례는 이 물음에 신선한 관점 하나를 내놓았다. 19세기 후반 이후 탈춤과 판소리 등이 각 지역의 현실에 동참하며 급속히 확산된 이유이기도 하다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생활 속으로 들어가 주민들의 요구에 몸으로 대응하며 자활했던 조선시대 민속예술혼의 재평가 작업인 셈이다.



 경남 합천 덕곡면 율지리 낙동강변에는 ‘활인대(活人臺)’라는 제방의 유적이 있다. 이름 그대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린 대’다. 1757년 처음 낙동강과 잇닿은 지역에 높고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쌓은 축조물로 이후 여러 번 개축되면서 숱한 홍수 속에서 지역민을 구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대홍수 때에는 700여 명이 이 대에 올라 살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64년 낙동강에 제방이 들어서며 그 기능을 다할 때까지 207년 동안 수만 명 목숨을 살린 활인대의 기록은 주민들이 세운 불망비(不忘碑)에 나온다.



 이 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1859년 활인대를 개축할 때 밤마리 오광대가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활인대 비석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고을의 윤치원 군수께서는 공금 30량을 비롯하여 고을 전체에서 수축(修築) 비용을 모아도 좋다는 내용의 문서 ‘걸립완문(乞立完文)’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 보내 주었다.” 걸립완문이란 걸립, 즉 풍물놀이를 통해 기금을 모으는 일을 허락하는 증서다.



 큰물이 나서 부서지고 무너진 활인대를 보수할 때마다 밤마리 오광대는 오락 차원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흥을 돋으며 필요 경비 모금과 노동력 제공 등 단결과 협력을 이끌어냈다. 풍물패가 마을의 기를 앞세우고 지역을 돌며 걸립한 뒤 그 대가로 후원금을 걷어 활인대를 고쳐 쌓은 것이다. 밤마리 오광대는 특히 멀리까지 모금 활동을 벌이는 ‘원정 걸립’을 하면서 오광대 탈놀이를 중심으로 인형극패·사당패·굿패 등과 결탁해 다채로운 연희를 개발하는 효과도 얻었다. 이런 연행 정신은 현실과 밀착한 무형문화유산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 교수는 “활인대와 밤마리 오광대의 관계는 이 시대의 민속예술 단체가 지역 사회를 위해 어떻게, 무엇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미학에서 미덕으로, 미덕에서 미학으로’라는 의제로써 21세기의 민속예술이 풀어가야 할 시대적 요구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활인대와 밤마리 오광대의 사례를 현재 시행하고 있는 무형유산제도에 활용해 살아 숨쉬는 문화재로 전환하기를 권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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