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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 반주, 그림자서 빛이 된 피아니스트

중앙일보 2015.04.16 00:38 종합 23면 지면보기
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리허설 중인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왼쪽)와 테너 김세일. 세계적 명성의 반주자 도이치의 내한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일본에서 100회 이상 공연했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적은 편이었다. [사진 음연·WCN]


1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랐다. 보통 ‘독창회’로 불리는 풍경이다. 성악가는 노래를 이끌고 피아니스트는 반주, 즉 성악가를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날 무대는 달랐다. 사람들의 관심은 ‘반주자’에 쏠려 있었다. 공연 제목도 독창회가 아니었다. ‘헬무트 도이치와 한국 성악가들이 함께하는 예술가곡 여행’. 반주자인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70)가 사실상 주인공이었다.

헬무트 도이치, 5번째 서울 무대
김세일·송시웅 등과 ‘가곡여행’
35년 전 한국 공연 이후 명성
노래 저절로 잘하게 해주는 연주
“주인공이 될 생각? 위험한 유혹”



 도이치는 현재 세계 무대에서 손꼽히는 성악 반주자다. 함께 공연한 성악가 명단은 곧 최근 유럽·미국 성악 무대의 ‘핫 리스트’다.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이안 보스트리지,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다. 뉴욕·런던의 공연장에서 이름 하나로 매진을 기록하는 스타 성악가들이다.



 이날 도이치는 한국의 테너 김세일(38)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슈만의 가곡들을 연이어 들려줬다. 도이치는 성악가의 노래 스타일을 그대로 따서 건반 위에 올렸다. 성악가의 노래를 피아노로 똑같이 재현했다. 바리톤 송시웅은 이를 두고 “성악가가 노래를 저절로 잘하도록 만들어주는 스타일”이라며 “노래와 피아노가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한다. 세계 톱 성악가들이 도이치를 앞다퉈 찾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헬무트 도이치
 ◆“독주 절대 안 해”=공연 후 만난 도이치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어떻게 모든 성악가들에게 맞출 수 있는가. 그는 “남의 음악에 맞출 수 있는 반주자는 타고난 성격부터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음악이 좋았지만 리더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또 외롭게 연주하는 것도 싫었다.”



 그는 빈 국립음대를 졸업한 후 성악 반주자의 길을 선택했다. 세계적 명성은 1980년대에 시작됐다. 도이치는 “그 시작이 사실 한국이었다”고 말했다. 80년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1929~98)와 함께 내한했던 무대를 이르는 말이다. 정상급 성악가로 활동하던 프라이와 첫 연주를 한국에서 했다.



 도이치는 당시 35세. 성악 반주 경력은 있었지만 프라이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했다. 도이치는 “프라이가 한국 무대를 계기로 내 반주 실력을 테스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테스트 결과는 합격. 프라이는 이후 12년 동안 도이치를 전속 반주자로 불렀다. 반주자로서 명성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조연에 가깝던 반주자의 위치를 주연으로 끌어올렸다.



 성악가들을 50년 동안 반주했다. 독주자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부럽지 않을까. 도이치는 “독주회를 열자는 제의가 많다. 연주료를 세 배로 주겠다는 제안도 있었다”며 “하지만 도무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성악곡에는 여러 감정이 생기는데 독주곡에는 열의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역시 반주자 성격은 따로 있는 모양”이라며 웃었다.



 ◆명 반주의 비결=사람들은 보통 반주가 독주보다 쉬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도이치는 “다른 종류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독주자는 빠른 손놀림, 실수 없이 연주하는 법 등을 연습한다. 반주자는 ‘소리’와의 싸움이다. 미묘하고 섬세하게 소리의 색채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천차만별인 성악가의 목소리마다 맞는 음색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뛰어난 독주 피아니스트가 반주자로서 최악의 연주를 들려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반주자는 반주자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음악계에서는 반주자(accompanist)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조력자’ 정도의 뜻이기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생각에서다. 대신 ‘협주자(collaborative pianist)’ 같은 용어가 쓰이고 있다. 도이치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못박았다. “함께하는 음악에서 주인공이 되려는 생각은 반주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유혹이다.” 반주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안겼지만 본인은 계속 성악가의 뒤에 있겠다는 뜻이다. 도이치는 19·22·26일 세 차례 더 서울 연주를 한다. 바리톤 송시웅, 소프라노 황수미 등과 독일·이탈리아 가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헬무트 도이치=1945년 오스트리아 빈 출생. 빈 국립음대에서 피아노·작곡 공부. 한 해 120여 회 성악 무대에 서는 가곡 전문 반주자. 빈·뮌헨·잘츠부르크·프랑크푸르트 국립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피아니스트·성악가들에게 독일 가곡을 가르침. 이번 내한은 다섯 번째로 그동안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 등과 함께 서울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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