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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깨어난 생의 감각…'화장' 김호정

중앙일보 2015.04.16 00:05






‘화장’(4월 9일 개봉, 임권택 감독)의 첫 장면, 아내(김호정)가 죽는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시간을 돌이켜 아내가 죽어가는 동안 남편 오정석(안성기)이 부하 직원 추은주(김규리)의 젊음에 어떻게 매혹되는지 보여준다. 그 옆에서 암으로 초라하게 죽어가는 아내는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 앞에 스러져간다. 아내가 느끼는 무기력과 모멸감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또렷이 아로새기는 감정이다. 그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김호정(47)을 만났다. 그는 이 영화가 자신에게는 새로운 시작과 같은 작품이라 말했다.

  



이 영화는 아내가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시작해, 아내의 암이 재발된 순간부터 이야기를 다시 풀어간다. 아내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수술을 위해 머리를 미는 순간부터 아니었을까.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니까. 그 장면에서 아내가 울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건 그래서다. 처음이라면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희망이 있어야 두려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거다.”







죽어가는 아내를 연기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나.



“나는 아내가 원래 자존심 강한 여자라 생각했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암에 걸리기 전까지 작가로 활동했다고 설정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다. 남편이 번듯한 화장품 회사의 중역이 되기까지 뒷바라지했고, 딸(전혜진)도 잘 키워 결혼시켰다. 그런 그가 암에 걸리면서 다른 사람, 특히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품는 낌새를 알아차리면서까지 말이다. 그 순간 여자로서 그가 느낀 수치심과 무기력함이란…. 그건 ‘자존심 상한다’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인 것 같다.”







아내는 죽어가면서도 키우던 개(이름이 ‘보리’다)를 끔찍이 아끼는데..



“그가 자신의 힘으로 사랑을 베풀고 보살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정석에게 자신이 죽으면 보리도 함께 보내달라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자신만큼 보리를 아끼고 보살필 사람이 없으니까, 자신이 죽고 나면 보리가 다른 사람의 손길에 목말라 할 테니까. 보리가 병든 자신처럼 무기력한 존재가 될까봐 걱정하는 거다.”







결국 이 영화는 나이 들어도 변함없는 것과, 나이 들며 마주해야만 하는 것을 동시에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나이 들어도 변함없는 건 극 중 정석이 은주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낯선 사람과 아름다움에 느끼는 매혹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다. 그 감정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반대로 나이 들면서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걸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거나 아프면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화들짝 놀란다. 나도 그랬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한데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참 초라하고, 사는 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뭔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 사람이 확 늙는 것 같다(웃음).”







독립영화 ‘나비’(2001, 문승욱 감독)에 출연한 뒤, ‘화장’에 출연하기 전까지 영화 출연작이 많지 않다. 그 시기에 투병 생활을 했다던데.



“연기에 대한 애정이 사그라들던 시기였다. 영화든 연극이든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울해졌고 몸도 아파졌다. 정작 연기를 할 수 없게 되니 거짓말처럼 연기가 하고 싶어지더라(웃음). 건강 문제(그는 ‘건강 문제’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싶지는 않다며 양해를 구했다)로 연기를 할 수 없다면, 연극 연출을 해볼까 하고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몸 상태가 다시 좋아졌다. ‘화장’의 출연 제안을 받은 게 그때다. 투병 생활을 했던 터라 죽어가는 역은 피하고 싶었는데, ‘난 배우니까 말로만 멋있는 척하지 말고 연기로 멋있는 걸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정작 촬영은 아주 ‘쿨하게’ 했다.”







쿨하게 촬영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



“개인적 경험, 그것도 아킬레스건이라 할 만한 기억이 연기에 겹쳐질까 두려웠다. 그 기억이 앞서 연기가 흔들리면 안 되는데. 촬영하면서 보니 그런 고민 하나하나까지 내 모든 걸 쏟아부어 연기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촬영을 할 때는 내가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의 촬영을 마치는 것으로 연기에 대한 모든 생각과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고 배우로서 새롭게 시작하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렇게 다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화장’이 개봉하면서 그 얘기를 이렇게 다시 꺼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웃음).”







한때 연기에 대한 애정이 사그라든 이유는. 연극계에서는 이미 이름난 배우고, 영화 ‘나비’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청동표범상(여우주연상)까지 받았는데.



“1991년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영화는 ‘침향’(2000, 김수용 감독)으로 시작했다. ‘나비’가 세 번째 영화였는데, 그 작품에서 낙태의 기억을 지우려는 주인공을 연기해 큰 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뒤로 그처럼 어두운 역할이나 주로 저예산 영화 출연 제안을 많이 받았다. 다양한 작품에 출연해 대중과 만나고 싶은데, 출연한 영화마다 인터넷에 ‘상영관을 찾기 힘들다’ ‘교차 상영을 하는 바람에 영화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렸다’는 얘기가 올라오니 회의감이 들었다. 마침 그 시기에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상심이 컸다. 고향 같은 연극계에서도 내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지고 나니, 사람들이 내 연기와 내 작품을 너무 쉽게 평가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것이 혼신을 다해 연기한 보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쉬고, 투병 생활을 거치며 생각해보니, 모든 문제는 다 나한테 있더라. 내가 누린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정말 주연·조연·단역 따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에 출연하려 한다.”







희망을 주는 작품이라면.



“난 영화에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보잘 것 없는 개인의 이야기를 발견할 때 어떤 희망을 얻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인물의 모습에 공감하면서 ‘나만 약한 존재가 아니구나’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영화의 힘이라 생각한다. 그런 작품의 일부가 되고 싶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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