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술 궂은 날씨에도 균형 유지한 보르도 레드

중앙선데이 2015.04.11 16:07 422호 26면 지면보기
메독 지역의 레드 와인들
매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리는 엉프리뫼(en primeur)는 전 해에 수확해 오크 통에 넣어 숙성 중인 와인의 샘플을 시음하는 자리다. 병입까지는 보통 2년 걸리는데 5개월여 만에 맛보는 것인 만큼 초보자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를 보고 그가 성장했을 때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 추정하는 셈이니 말이다.

프랑스 보르도 2014년 엉프리뫼 시음회

필자는 이 시음회에 16년째 참가하고 있다. 시음은 지역별로 이루어지는데 보르도 남쪽 페삭 레오냥 지역의 그랑 크뤼 협회 와인 50여 종(화이트· 레드 포함), 레드 와인의 보고인 메독 지역의 와인 80여 종, 그리고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 소테른 지역의 와인 30여 종을 포함하고 있다. 매년 시음하지만 보르도는 매년 같은 맛, 같은 품질을 선보이지는 않는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바탕에는 변화하는 날씨와 토양, 인간의 조화가 있었다.

날씨가 문제였다. 요즘 몇 년 사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글로벌 이상 기후는 보르도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 포도 꽃이 늦게 피는 바람에 수정이 늦어지고 이에 따른 성장 발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9월부터는 날씨가 좋아져 정상적인 수확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드는 보르도 와인의 특성상 어느 품종 하나라도 뒤떨어지면 좋은 와인을 얻기는 어려워진다. 때문에 모든 품종의 수확이 끝나는 9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전체적으로 올해는 초기의 날씨 부진 때문에 메독 지역과 페삭 레오냥 지역의 멀롯 품종 품질이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에 비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화이트 와인과 스위트 생산지인 소테른 지역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높은 산도를 보인 것에 대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페삭 레오냥은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모두 생산하는 지역이다. 화이트는 소비뇽과 세미용 품종을 주로 심고 가끔 무스카델 품종도 조금 섞어 풍미를 더한다. 가장 중요시하는 맛은 산도인데 화이트가 갖고 있는 상큼함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다. 더 중요한 것은 과일의 풍미와 산도가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2014년은 수확기 밤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자연 산도는 아주 두드러졌지만 수확 이전의 날씨 탓에 와인의 균형을 이루진 못했다. 대부분의 화이트 와인에서 신선한 맛이 도드라졌다.

이런 기본 맛에 균형과 깊이를 더하는 것은 포도가 태어나는 환경과 만드는 사람의 기술과 노력이다. 레드 와인의 경우는 대부분 균일한 맛을 보여주었다. 색은 루비에 과일 향이 잘 느껴지고 타닌은 부드럽지만 샤토에 따라 타닌을 약간 더 추출한 맛을 보여주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은 정도에서 잘 마무리되었고 대부분 와인에 산미가 기분 좋게 느껴져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보르도 레드 와인의 큰 장점 중 하나가 장기 숙성인데 평균보다는 이른 시기에 즐기면 좋을 듯 했다. 100점 기준으로 87~90점 사이로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샤토 라 루비에르, 샤토 올리비에, 도멘 드 슈발리에 등의 레드 와인이 눈에 띄었다.

“아름답지만 세련되지 못한 여인의 느낌”
마고·리스트락·물리스·생 쥴리앙·포이약·생테스테프 등 모두 8개의 AOP(원산지 보호 구역)를 갖고 있는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 산지인 메독 지역은 올해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샤토별로 블랜딩하는 품종의 양이 다르지만 역시 카베르네 품종의 텃밭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멀롯 품종보다 늦게 수확하는 카베르네의 품질에 따라 그 해 와인의 품질이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함께 블렌딩하는 멀롯의 품질이 좋아야 완벽한 해의 와인을 만들 수 있는데 2000년 이후 2005년과 2009년 그리고 성격은 좀 다르지만 2010년 외에는 주목받은 빈티지가 없다. 2014년 빈티지는 조생 종(수확 시기가 이른 것)인 멀롯이 어려움을 겪어 샤토마다 수확과 선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만 했다. 반면 만생 종(수확 시기가 늦은 것)인 카베르네는 수확기의 날씨가 좋아진 덕분에 충분히 익었지만 초창기 날씨의 어려움 때문에 이 역시 완벽한 품질로 태어나지는 못했다.

전형적인 여성의 부드러운 특징을 보여주는 마고 지역은 타닌은 좋았지만 부드럽고 둥근 맛은 아니어서 포도 자체의 완성도는 떨어졌고 신선함이 약해 전체적으로 매력이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멀롯은 적게, 프티 베르도는 많이 사용한 샤토들이 좀더 좋은 입감을 보여주었다. 필자는 샤토 브란 칸트냑의 품질이 좋게 느껴졌다.

생 쥴리앙 지역 와인들은 향이 아주 좋았으나 결정적 맛이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샤토 베슈벨 같은 와인은 이전에 비해 맛에서 진전을 보였으며 정교함이 느껴졌다. 포이약 와인들은 힘이 있었지만 많이 닫혀있어 쉽게 시음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깊은 색과 조용하지만 드러내지 않은 깊이를 느끼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카베르네의 특징이 잘 살아 있었다.

거친 와인의 대명사인 생테스테프 지역은 진한 색이 돋보였다. 이 지역 고유한 흙 냄새까지 동반했지만 전체적으로 우아함은 결여되어 있었다.

메독 전체 지역의 느낌은 외모는 아름답지만 대화를 해보니 세련됨과 우아함이 떨어지는 여인 같았다. 물론 수확 시기가 늦어져 엉프리뫼 시음 시기가 예년보다 2주 정도 일렀던 이유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달콤함의 대명사 소테른 지역은 당도와 산도의 조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수확 시기를 길게 잡고 정교하게 수확했다.

그 결과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강한 산도를 얻었고 달콤함과 복잡함도 함께 이끌어냈다.

유기농과 바이오 농법으로 새 길 모색
요즘 보르도에서는 유기농법이 대세다. 여기에 우리나라 전통 농부들처럼 월력을 사용한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농법에 확신을 갖고 지난 10년 이상 포도밭 인증을 받고 있는 샤토 퐁테 카네 오너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뭐라든 나는 이 길이 우리의 자연과 후세를 위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계속 할 생각입니다. 이제 조금씩 포도밭도 스스로 균형을 찾는 것 같아요.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인공적인 향과 맛을 배제하고 자연이 주는 포도 본연의 맛을 퐁테 카네 병에 담고 싶어요. 이것이 얼마나 숙성력을 갖고 있는지는 지켜봐야겠지요.”

그의 와인은 새 오크통을 50% 이상 사용했음에도 오크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다른 포이약 지역의 와인과도 완전히 다른, 실크처럼 부드러운 맛이 잔잔하게 입안에서 여운을 남겼다.


보르도 글·사진 김혁 포도플라자 관장 hkim@podoplaza.com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