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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인생 원동력은 권력·명예·돈이 아닌 아이디어”

중앙선데이 2015.04.12 01:01 422호 15면 지면보기
1 쿠바의 수도 아바나 구시가지 북쪽에 있는 말레콘 해변.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바나를 방문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교황을 직접 안내하며 말레콘을 걷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 교황의 모자 주케토가 날아가 바다에 떨어져버렸다. 그러자 피델은 재빨리 바다로 뛰어들어 물 위를 걸어가 주케토를 주워 교황에게 돌려줬다.

쿠바에서 본 쿠바의 미래 <3>

다음날 언론은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다. ‘물 위를 걷는 피델! 역시 그는 신이다!’라며 쿠바 일간지 ‘그란마’는 호들갑을 떨었다. 바티칸 일간지는 ‘교황의 기적이 카스트로를 물 위로 걷게 했다’며 대서특필했다. 오직 쿠바계 미국인들이 구독하는 ‘마이애미 헤럴드’만 작은 박스로 이 소식을 전하며 ‘수영도 못하는 카스트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세상이 피델 카스트로를 어떻게 보는지 잘 보여주는 농담이다. 비록 그가 물 위를 걸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피델의 인생은 수많은 기적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피델에 대한 농담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쿠바인들은 피델을 지칭할 때 손가락으로 턱을 치고 두 손으로 긴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한다. 모든 쿠바인들이 쓰는 판토마임은 피델을 가리킨다. 피델이라는 이름을 발설하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는 곳이 쿠바다.

2 혁명박물관에 걸린 대형 국기.
대통령 된 만델라 “당신 덕에 가능했다”
1953년 젊은 변호사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당시 피델의 목숨을 극적으로 구해준 흑인 중위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디어를 죽일 수는 없다.”

피델은 이 말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인생의 원동력은 권력도 명예도 돈도 아닌 아이디어”라고 했다. 소련 붕괴 이후의 ‘특별시기’를 극복할 때도 피델은 인민들에게 ‘아이디어의 전투’를 설파했다.

피델이 국제적인 지도자가 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업적은 앙골라전쟁 참전과 승리일 것이다. 앙골라전이 일어나기 1년 전,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쿠바와의 해빙을 모색했다. 몇 차례 비밀접촉으로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몇몇 통상조치의 혜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 피델은 앙골라 파병을 감행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파투를 놓아버렸다.

카스트로는 앙골라 파병의 목적이 아프리카 해방을 넘어 남아공 백인우월주의 정권을 타도하고 넬슨 만델라의 지지 기반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쿠바인의 3분의 2 이상이 아프리카 흑인의 자손이라는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피델은 파병으로 국내외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91년 여름, 아주 특별한 손님이 쿠바를 방문했다. 바로 전해에 27년간의 투옥 끝에 자유를 찾은 남아공의 전설 만델라였다. 만델라는 피델에게 지난 10여 년간 아파르타이드 정권과 싸우고 ANC를 다방면으로 지원해준 것에 대해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94년 만델라 취임식에 최고 주빈으로 초청받은 피델에게 만델라가 귓속말로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당신 덕분에 가능했소.” 그 속삭임은 한 방송사의 고성능 마이크에 잡혀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전해졌다.

55년 전 뉴욕 호텔서 쫓겨난 피델
이듬해인 95년 피델은 유엔 설립 50주년 행사에서 연설을 했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모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위험을 설파했다. 국제적 거물이 된 피델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미국 경제인과의 간담회를 포함해 일정이 빽빽했지만, 그가 뉴욕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뜻밖에도 할렘이었다. 환호하는 인파에게 피델이 인사했다. “35년 전 우리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 할렘은 우리를 반겨줬습니다.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60년 피델은 쿠바 국가원수로서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기 위해 59년에 이어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그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과 인종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자, 미국 보수언론은 피델을 ‘빨갱이’로 몰아갔고, 피델이 투숙 중이던 호텔 주인은 그를 일방적으로 쫓아냈다. 화가 난 피델은 유엔 건물 앞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할렘의 한 호텔 주인이 피델에게 무료로 숙박을 제공했다. 피델은 할렘에 머물며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엑스부터 소련 당 서기장 흐루시초프까지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만났다.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입니까?”

미국 기자들이 피델을 만나고 나온 흐루시초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피델이 공산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가 피델주의자(Fidelist)라는 겁니다!”

피델에게는 그런 매력이 있다. 대다수의 쿠바인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피델주의자라고 자부한다. 쿠바인들은 피델을 삼촌, 할아버지, 선생님 그리고 친구로 여긴다. 많은 아바나 지인들은 피델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악수를 하고 대화까지 했다는 것이다. 몇몇은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바나 인구는 200만 정도인데, 반세기 동안 집권한 피델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인민들과 접촉했기 때문이다.

능력이 권력을 못 따라가는 이들은 권위주의에 의존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분리할 줄 아는 법이다.

언젠가 뉴욕행 비행기에 동승한 미국 기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다. “항상 방탄복을 입고 다니는 게 불편하지 않나요? 뉴욕에서도 계속 입으실 건가요?” 피델은 웃으면서 계급장 없는 군복을 풀어헤쳐 가슴을 보여줬다. 방탄복은 없었다. “내가 입는 유일한 조끼는 ‘도덕의 조끼’(Moral Vest)요.”

진정한 권위는 권력이 아니라 도덕적 명분에서 나온다. 그것이 미국을 대적한 쿠바의 무기였다.

3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의 모습이 담긴 입간판. “당은 오로지 인민을 통해, 그리고 인민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쓰여 있다. 쿠바=정승구 4 교황과 피델. [중앙포토]
시위대 앞에 나서 “내게 돌을 던져라”
“우리는 특별한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쿠바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입니다. 왜냐고요? 이제 우리는 홀로 거대한 제국과 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바로 혁명 정신입니다! 나약한 겁쟁이들만이 투항하고 다시 노예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명예롭고 용기 있는 우리 인민들은 절대 노예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소련 붕괴로 절망에 빠진 인민들에게 피델은 외쳤다. 그러나 경제위기는 계속됐다. 94년에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반정부시위까지 일어났다. 아바나 말레콘에 모인 군중이 외친 구호는 역설적이게도 ‘리베르타드!’(자유)였다. 혁명이 약속한 ‘해방’에는 먹고살 ‘자유’가 보장돼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사람들로 말레콘이 꽉 찼었지. 하지만 TV에서 보는 외국 시위들처럼 폭력적이거나 조직적이지는 않았어. 몇몇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수준이었지. 경찰들이 ‘불법집회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군중은 계속 늘어났어. 그때 피델이 나타나 가두연설을 시작했지.”

가이드 하비에가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피델의 별명이 뭔지 알아? ‘미래형’이야. 이탈리아인을 조용히 시키려면 양손을 묶어야 되고, 피델을 침묵시키려면 스페인어에서 미래형을 없애면 된다고들 했지.”

“그래도 조상 들먹이는 ‘과거형’보다는 낫지 않나.”

“시위대에게 피델이 외쳤어.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불만 있으면 내게 돌을 던져라!’”

“멋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던졌어?”

“아니. 연설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사복경찰 1000 명 정도가 피델을 둘러싸고 있었어. 근데 어떤 미친 놈이 물병을 던졌다는 얘기도 있어. 물병은 피델 근처도 못 미쳤지만, 사복경찰들이 그 놈을 눈 깜짝할 사이에 두들겨 패고 어딘가로 끌고 갔다 하더라고.”

미 법무장관도 피델의 치적 인정
11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한 ‘노장’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피델은 자신이 없는 쿠바를 준비하라며 2008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인류 역사상 피델만큼 오래 집권한 인물은 드물다. 조선의 영조와 재임기간이 같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른 왕이나 독재자와 달리 우아하게 살아서 권좌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카스트로 정부는 전 세계에 보여줬다. 아픔, 무지, 빈곤과 부패로 얼룩진 바티스타 정권으로부터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이들이 먹고, 교육받고, 치료받는 나라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회적 시스템을 지구상의 다른 나라에도 수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 3세계 공산주의자가 한 말이 아니다. 미국 법무장관을 지낸 램지 클라크의 평가다.

국가보다 큰 개념이 사회다. 정권을 잡는 정객은 많지만, 한 사회의 문화와 체질을 개선하고 진화시키는 지도자는 흔치 않다.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에서 온다고 믿은 피델은 늘 강조했다. 의식주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고, 가치관은 지식과 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그렇게 피델은 쿠바인들에게 불가능에 도전할 것을 설득했고, 인민들은 그에 반응했다.

21세기의 쿠바는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다. 스페인, 미국, 러시아, 그 어느 나라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주국가다. 그리고 쿠바혁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지 않았다. 만약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피델이, 그리고 체 게바라가 기득권의 안락함에 안주해 변호사와 의사로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피델은 은퇴하기 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골리앗과 맞선 다윗을 기억하듯이, 신념과 정의를 위해 거대한 제국과 싸운 작은 쿠바도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정승구 영화감독, 작가. 쿠바를 좋아한다.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하버드대에서 정책학을 공부했다. 장편과학소설『영원한 아이』를 썼다.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를 쓰고 연출하고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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