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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겨냥한 ‘1호 명령’, 린뱌오와 마오 결별의 단초

중앙선데이 2015.04.12 02:56 422호 29면 지면보기
1967년 10월, 경호원들과 함께한 린뱌오(가운데 줄 왼쪽 네번째)와 예췬(가운데 줄 왼쪽 세번째). 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세번째가 딸 도우도우와 아들 리커.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시절 국민당 군복을 입은 저우언라이와 린뱌오(왼쪽). 1942년 10월, 전시수도 충칭.
린뱌오(林彪·임표)의 군 간부 요직 기용은 특징이 있었다. 정치력을 겸비하고 혁명에 공이 있으면 금전이나 복잡한 이성 관계는 문제삼지 않았다. 정치적 능력이나 혁명에 공이 없으면 주변이 깨끗해도 발탁하지 않았다. 군구 사령관 등 요직에 기용되는 사람은 린뱌오에게 한 차례 호된 비판부터 받았다. 비판은 신임과 기용을 의미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1>

4대금강(四大金剛) 중, 치우후이쭤(邱會作·구회작)는 황용셩(黃永勝·황영승)이나 우파셴(吳法憲·오법헌), 이쭤펑(李作鵬·이작붕)에 비해 흠이 많았다.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 많았다. 틈만 나면 여자 부하나 친구 부인들과 풍류를 즐기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린뱌오는 치우후이쭤를 총애했다. 1966년 8월 중순, 후근부장(后勤部長)에 임명했다.

군 의과대학 홍위병들은 치우후이쭤의 후근부장 부임에 분노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하고, 도덕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며 강당에 가두고 두들겨 팼다. 이듬해 1월 24일, 실신 상태에서 깨어난 치우는 감시원을 구슬렀다. 예췬(葉群·엽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부주석 곁을 떠나지 않겠다.”

린뱌오는 예췬을 의과대학으로 파견했다. 예췬은 홍위병들에게 린뱌오의 친필서명을 내밀며 치우후이쭤를 강제로 끌어냈다. 예췬을 따라 나온 치우는 베이징 교외 향산(香山)에서 린뱌오를 만났다. 다음날, 생명의 은인 린뱌오를 기념하는 일기를 남겼다. “25일 0시 40분,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나와 처자는 물론이고 자녀들도 이 날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린 부주석이 보낸 사람들이 찾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동은 가슴 속에서 거대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진정제를 먹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 아무리 참으려 해도 감격에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1970년 9월 뤼산회의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른 린뱌오와 4대 금강. 오른쪽부터 치우후이쭤, 황용셩, 린뱌오, 우파셴, 리쭤펑. [사진 김명호]
치우후이쭤는 예췬에게도 감사 편지를 보냈다.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가루가 돼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겠다.” 생일까지 1월 25일로 바꿔버렸다. 부인 후민(胡敏·호민)은 린뱌오의 며느리와 사윗감을 물색하기 위해 전국의 10여 개 도시를 오가며 9000 여명을 직접 만나봤다. 예췬도 치우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국화(菊花)의 계절이 돌아오자 한편의 시(詩)로 충성에 화답했다. “가지를 품은 봉오리, 비록 시들지언정, 서풍(西風)에 흔들려, 떨어지지 않겠다.” 중앙 문혁 소조 회의에서도 치우를 치켜 올렸다. “개국 이래 네 명의 후근부장이 있었다. 그 중, 치우후이쭤가 가장 훌륭한 부장이다.”

린뱌오와 4대금강은 문혁이라는 특수한 시대에 서로 의존했다. 린뱌오는 발탁해서 보호하고, 4대금강은 권력을 만끽하며 린뱌오와 자신들의 반대세력을 제거했다. 치우후이쭤만 하더라도 후근부장 재직 4년간 사설 감옥을 만들어 군 간부 462명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1969년 10월 18일, 수저우(蘇州)에서 휴양 중이던 린뱌오는 비서를 통해 총참모장 황용셩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이틀 후, 소련 대표단이 베이징에 온다. 회담은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연막이다.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 중요 장비와 목표물들 은폐해라. 연락망을 강화하고 포 부대는 발사 준비를 완료해라.”

황용셩은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허락 없이 린뱌오의 지시를 따랐다. 전군에 ‘1호 명령’을 발포(發布)했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린뱌오의 지시에 ‘1호 명령’이란 명칭은 말도 안됐다.

인간은 의심과 변덕의 노예다. 그래서 그런지, 개와 인간의 특성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종종 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린뱌오에 대한 마오의 신뢰는 ‘1호 명령’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5월 “정권은 무엇인가? 역량과 권력은 무엇인가? 별게 아니다. 군대만 있으면 다 된다”는 담화까지 발표할 정도였다.

군 지휘권을 놓고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됐다. 1967년, 군 기관지 ‘홍치(紅旗)’는 “중국인민해방군은 우리의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이 손수 만들고, 린뱌오 동지가 직접 지휘한, 위대한 군대”라는 사론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1970년 8월 1일 건군 기념일을 앞두고 건군의 주역과 지휘자를 놓고 애들 싸움 같은 논쟁이 벌어졌다.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가 “마오주석과 린부주석이 직접 지휘한 중국인민해방군”이라고 하자 천보다(陳伯達·진백달)가 3년 전을 상기시켰다. “마오주석과”를 삭제하자고 주장했다. 장춘차오가 굽히지 않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당황했다. 마오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다.

마오쩌둥은 꼴들도 보기 싫다며 화를 냈다. “우리의 군을 만든 사람과 지휘자는 한둘이 아니다. 나 한 사람도 아니고, 린뱌오 한 사람도 아니다. 우리 당의 수 많은 동지들이 군을 만들고 지휘했다.”

8월 23일, 린뱌오와 마오쩌둥은 장시(江西)성 뤼산에서 공석인 국가주석 직을 놓고 정면 충돌했다. 결별은 시간문제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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