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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그는 진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남편이 떠난 자리에 꽃핀 시

중앙일보 2015.04.11 00:20 종합 1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그를 두고 오는 길

정국인 지음

홍성사, 147쪽, 1만원




시(詩)는 논리의 잣대 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처 머리로 납득하기 전에 터져 나오는 울음이거나 고통스러운 신음인 경우가 많다. 시인 고은은 수만 년 전 원시인의 주검과 함께 매장됐던 꽃의 화석에서 시를 발견한다고 했다.(산문집 『오늘도 걷는다』) 실재하던 인간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꽃으로 달래려는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라는 얘기다.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무심코 꽃을 던진 원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시인이었던 셈이다.



 평생 시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정국인(54)씨가 난생 처음 펴낸 시집 『그를 두고 오는 길』 역시 그런 시의 부류에 속한다.



 책의 앞날개, 뒷부분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정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대학 졸업 후 일본계 은행 서울지점에서 12년간 일했을 뿐이다. 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온 가족이 저녁식사를 함께 한 토요일 오후 정씨는 끔찍한 소식을 접한다. 복통을 호소한 남편이 검진 결과 현재 의술로 손 쓸 수 없는 말기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2012년 가을의 일이다.



 30년간 일간지 기자로 일하며 늘 활기차고 건강해 보였던 남편. 정씨는 한동안 ‘커다란 비눗방울에 갇힌 채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투병 일지를 쓸 요량으로 각종 검사 결과, 의사 지시사항, 남편의 식사량 등을 적었다. 순간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과 함께 글로 풀려져 나왔다. 남편이 암 진단 후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355일 만에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시는 써졌다. 울음이자 신음인 시, 기교 없이 소박해 더 진솔한 50여 시편들이다.



 표제시 ‘그를 두고 오는 길’은 안타까움과 명복을 비는 마음 사이에서 분열된 듯한 내면을 보여준다. 두 번째 연, ‘따뜻한 저녁상을 받는데/더 미안했다/그는 이제/더 맛난 것을 먹을 터인데’ 같은 대목이 그렇다.



 ‘그는 그렇게 떠났지만(…)//시간 속에 공간 속에/보이지만 않을 뿐/항상 있다/실재보다 더 진한 흔적으로 말이다’. 해학을 가미한 시 ‘시월드와 친정랜드’는 남편 없는 슬픔의 실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시작(詩作)’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뭔지 모를 덩어리가/내 안에 꽉 차서/그것을 비워 내지 않고는/터질듯 아파서/그저/적어 내려갔다’. 또 ‘영영’에서는 고통을 맛본 자의 인생 통찰, 이 세상을 훌쩍 뛰어 넘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진다. ‘낮아지고/잃고/늙고/아프니/내가 깃털처럼 가볍다//아, 참 다행이다/영영 여기 있지 않는다니…’.



 『그를 두고…』는 등단하지 않은 아마추어 시인들의 시집 시리즈인 ‘우리들의 시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조울증과 싸우며 성화(聖畵) 작가로 활동하는 배서우(44)씨의 『내 동생 랑랑』, 시력 때문에 파일럿의 꿈을 포기한 뒤 현재 서울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사역하는 이동규(57) 목사의 『6월이 지나가고 있다』가 함께 나왔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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