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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생각지도] 유승민의 신보수를 지지함

중앙일보 2015.04.11 00:05 종합 26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제가 꿈꾸는 보수는 정의롭고 평등하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고 희생하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보수입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011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 던진 출사표다. 그는 8일 국회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이 얘기를 또 했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보수.” ‘평등하고’와 ‘희생하며’가 빠졌지만 의미가 달라졌다고 보긴 어렵다. 정의롭고 공정한데 불평등하기 어렵고, 희생 없이 따뜻한 공동체가 되기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당명은 바뀌었어도 유승민의 꿈은 달라지지 않았던 거다. 지난 1월 원내대표 경선 출마 때도 그는 말했다. “4년 전 전당대회에서 저는 고통받는 국민들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 국민 편에 서는 용감한 개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원내대표에 출마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인 줄 몰랐었나. 그가 세 번째 하는 똑같은 얘길 놓고 그를 대표로 뽑았던 선량들이 말들이 많다. 개인 소신을 왜 당 방침처럼 얘기하냐는 거다.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들린다.



 그토록 당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4년 전 대표 경선에서 2등을 하고 기어이 원내대표가 되는 게 이 나라 집권여당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 방침이라는 게 바뀔 때가 됐다는 얘기 아닐까. 당 방침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나 말이다.



 유승민 말대로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은 우리나라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시장경제 발전에 많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이 민주주의의 제한과 근로자들의 희생 위에 피어난 개발 독재의 열매였다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나. 그로 인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정부가 자원을 독점하고 가격을 결정하며 한곳에 몰아주는 관치 계획경제가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왔다.



 외환위기 이후 그나마 시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생겨났지만 그 역시 공정한 룰에 따라 경쟁하는 자유시장경제였다고 보기 어렵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기업의 시장지배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아무리 기술력이 있더라도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 기업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시장질서와 불공정 경쟁을 감시해야 할 정부와 정치권도 성장 패러다임에만 매달려 대기업 횡포에 눈감고 투자에만 목을 매다 스스로 시장경제의 걸림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사이 경제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형적 비대가 됐고 양극화는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벌어져 공동체의 붕괴를 걱정해야 할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 나라 백성들이 두 차례 좌파 정권을 선택한 게 다른 이유가 아니며, 현 정권도 지금은 용도 폐기했지만 ‘경제 민주화’를 공약으로 외치지 않으면 안 됐었던 것도 그런 현실 인식 때문 아니었던가.



 오늘날 저성장과 양극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을 해결하려는 좌파의 실험은 세계 곳곳에서 실패로 결론지어지고 있다. 결국 우파가, 자본주의로 해야 하는데 지금 보수의 얼굴과 그 천박한 자본주의 도구로는 감당해낼 수가 없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의 보수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공정한 경쟁을 해본 경험이 없잖은가 말이다.



 그걸 바꾸자는 게, 공정한 시장을 가진 진짜 자본주의를 해보자는 게, 그래서 보수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자는 게 유승민의 ‘신보수’라고 내 귀에는 들리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 흔히 보수의 가치로 자유와 책임을 든다. 하지만 공정함 없는 자유는 야생 정글을 의미하며, 나눔 없는 책임은 약육강식일 뿐이다. 그건 보수가 아니라 반동이며 그런 반동으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변화를 수용해 개혁을 주도한 영국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말에 답이 있다. “(반동적) 보수주의는 원칙에 빠져 진보를 부인함으로써 현재를 바로잡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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