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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80세 청년' 감독 임권택

중앙일보 2015.04.11 00:05 종합 27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극장 여기저기서 관객의 흐느낌이 들렸다. 불이 켜지고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밖으로 걸어나오니 찬란한 봄. 먹먹함이 가라앉기까지 한참 걸렸다.



 임권택 감독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김훈의 소설 『화장』을 영화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2년째 뇌종양을 앓는 아내의 병상을 지키는 남자가 젊고 아름다운 여직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얘기다. 삶과 죽음, 욕망과 절망, 피어나는 것과 시드는 것이 한데 뒤엉키는 순간을 정교하게 포착한 원작을 영화인생 50년 묵직한 내공으로 갈무리했다. 더러 올드한 감성도 있지만, 전체의 무게감을 덜어버릴 정도는 아니다. 특히 최소한의 존엄도 허락하지 않으며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삶을 증오하게 하는 죽음의 맨 얼굴을 직면케 하는 대목에서는 진저리가 처졌다.



  도입부 숨진 아내가 실려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안성기의 얼굴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명연이다. 아마 지문에도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이라 써 있지 않았을까. 지금껏 본 그의 어떤 연기보다 좋았다. 결론적으로 김훈·안성기·임권택의 결합은 ‘옳았다’.



 제작자 심재명은 개봉 후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팔순의 연세에 한 달여 수많은 인터뷰 등 홍보에 애쓰셨던 감독님께서 개봉 날 이런 문자를 보내셨다. ‘최선을 다하시는 명필름의 모습이 아름답고 눈물겨웠습니다. 내실 있는 결과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 정중함에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화장실 장면(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남편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올누드를 감행한 배우 김호정에게도 촬영 후 90도로 절하면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영화를 이렇게 살려주시고 많이 아름답게 만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임 감독이다.



 그의 다음 영화는 ‘시래기 한움큼’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다. 사라져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얘기다. 단편도, 다큐멘터리도 처음이다. 사실 102번째 영화 ‘화장’도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천착한 전작들과 달리 존재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다. “기존 스타일과 다른 작품을 해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 80세 노감독은 80세 거장, 80세 현역인 것도 모자라 아직도 도전하는 젊은 감독인 것이다. 초창기 한두 편으로 조로하는 숱한 감독들이 떠오른다. 나는 어떤가. 나는 아직, 충분히 젊은가. 이미 너무 늙은 것은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25세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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