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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세이브는 작은 기록으로 남고, 블론세이브는 강한 기억으로 남는다"

중앙일보 2015.04.06 17:40
지난 5일 서울 잠실야구장 라커룸. 삼성 마무리 투수 임창용(39)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나타나더니 넙죽 인사를 했다. LG 마무리 투수 봉중근(35)이었다. 임창용은 슬며시 웃었다. 둘 사이에는 말 없이도 통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봉중근은 최악의 일주일을 보냈다. 지난달 29일 KIA 필에게 역전 끝내기 투런홈런을 얻어맞아 패전투수가 되더니 지난 3일에는 삼성 박한이에게 결승타를 맞고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이어 4일에는 삼성 최형우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한 뒤 힘겹게 세이브를 올렸다. LG팬들은 "봉중근의 보직을 바꿔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봉중근은 "팬들이 무척 화가 난 모양이다. (잠실구장에 주차해 둔) 내 차를 긁어 흠집을 내기도 했다"면서 "시즌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보직변경 얘기가 나오다니…."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무리 투수는 흔히 소방수로 불린다. 불(위기)을 끄면 당연한 거지만 사고(실점)가 나면 홀로 비난을 받는다. 역전패를 당하면 '방화범'이라는 비난을 듣는 경우가 다반사다. 마무리 투수들은 '소방수'가 순식간에 '방화범'으로 몰릴 때 감정은 공포에 가깝다고 말한다.



지난해까지 봉중근은 LG 팬들의 영웅이었다. 2011년 왼 팔꿈치 수술을 받고 선발에서 마무리로 전환한 그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95세이브를 기록했다. 2014년 올린 38세이브는 LG 구단 최다 기록이었다. 전통적으로 불펜이 약했던 LG는 봉중근 덕분에 2013, 2014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봉중근이 3년 동안 쌓아온 신뢰는 올시즌 3경기 만에 무너졌다. 실제로 그런 게 아니라 팬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LG 코칭스태프는 비난여론을 진화하기 위해 나섰다. 양상문 LG 감독은 "봉중근의 보직을 바꾸는 건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차명석 LG 수석코치도 "이제 시작일 뿐이다. 올해도 봉중근이 30세이브를 할 것"이라고 신뢰를 보냈다.



봉중근을 셋업맨이나 선발요원으로 돌린다면 LG의 마운드 운용이 싹 바뀌어야 한다. 이는 감독과 투수코치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오승환(33·일본 한신)처럼 커리어 내내 마무리만 맡은 투수는 프로야구 역사상 없었다. 때문에 모든 감독이 매년 마무리 투수 낙점을 고민하고, 한 번 정하면 흔들려고 하지 않는다.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게 현실적인 이유다. 과거 LG는 이동현(2004년)과 우규민(2006~08년)에게 뒷문을 맡긴 적이 있었지만 봉중근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KIA는 2013년 외국인 선발 앤서니를 마무리로 돌렸고, 2014년 외국인 불펜요원 어센시오를 영입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전전후 투수 윤석민이 올해 복귀하자 KIA는 그에게 소방수를 맡겼다.



자유계약선수(FA) 사상 최고액(4년 90억원) 투수를 마무리로 쓰는 걸 두고 일부 팬들은 "최고급 생선으로 매운탕을 끓이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김기태 KIA 감독은 "현재로선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윤석민이 3경기에서 모두 세이브를 올린 KIA는 6전 전승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선발로만 던진 투수들은 마무리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6~7이닝을 막는 그들에겐 '1이닝 무실점'의 역할이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봉중근이나 윤석민도 선발로 뛸 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무리 투수의 아웃카운트 3개(혹은 그 이상)는 앞서 잡은 카운트와 확연히 다르다. 야구 소방수들은 실제 소방수처럼 '잘해야 본전' 취급을 받는다. 다 잡은 경기를 놓치면 2패 이상의 충격에 빠진다. 선발과 마무리를 모두 경험한 투수들이 "마무리가 훨씬 어렵다"고 토로하는 이유다. 오승환도 세이브에 실패한 날이면 소주를 들이킨다고 한다.



한국에서 200세이브, 일본에서 128세이브를 거둔 임창용이 말했다.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경기에서 세이브에 성공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팬들은 세이브 대신 블론세이브를 기억한다. 나도 실패한 기억이 오래 남으니까 당연하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마무리의 숙명이다."



임창용도 5일 LG전에서 블론세이브(2실점)를 했다. 아쉬운 수비가 겹쳤고, 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마무리에겐 변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승부는 결정됐다. 세이브는 작은 기록으로 남고, 블론세이브는 강한 기억으로 남는다.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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