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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월요일] 딸 사춘기 때 멀어지면 … '딸 바보'가 '바보 아빠' 된다

중앙일보 2015.04.06 02:30 종합 20면 지면보기
최근 각종 TV 프로그램에서는 연예인 부녀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부녀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사진 속 배우들은 방송에서 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딸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왼쪽부터 배우 조민기, 개그맨 이경규, 배우 성동일, 격투기 선수 추성훈, 배우 조재현.

#1 ‘아빠 오늘도 맛점(맛있는 점심)! 사랑해 쪽쪽’. 올해 스물여덟 살인 우리 딸은 하루도 빠짐없이 점심시간이 되면 내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나? 식당 테이블 앞자리에 앉은 직장 동료가 묻는다. “휴대전화 보면서 왜 이렇게 실실 웃어? 애인한테서라도 연락 왔어?” 그럼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한다. “아니, 요새 딸내미가 이런 걸 자꾸 보내더라고….”

 공무원 김정운(53)씨 이야기다. “따님하고 정말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부러워요.”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한마디씩 건넨다. 그 사이에서 김씨의 직장 동료 최모씨도 새삼 얼마 전 있었던 딸과의 일화가 떠올랐다.

 #2 “아, 아빠는 에티켓도 없어? 왜 내 방문을 마음대로 열어!”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우리 딸. 방에서 혼자 뭐하나 싶어 문을 열었더니 벌컥 화를 낸다. ‘이 자식 봐라?’ 나도 한마디 한다. “아빠가 딸 방도 마음대로 못 들어가느냐? 버릇없이….” 그랬더니 이게 누굴 닮았는지 절대 안 진다. “나도 사생활이 있다고. 언제까지 간섭할 건데!” 문이 다시 꽝 닫힌다.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이성(異性)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전문가는 “딸이 자라면서 만나게 될 모든 이성의 기준은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아버지와 딸의 사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껌딱지처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멀어지기도 쉽다.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오묘한 부녀 관계들을 엿볼 수 있다. 시작은 ‘딸 바보’였다. MBC ‘아빠! 어디가?’의 송종국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추성훈 이종격투기 선수, 배우 엄태웅 등이 뒤를 잇는다. 이들은 조금씩 스타일은 다르지만 최대한 딸이 원하는 모든 걸 해주려 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한다. 혼을 내려 해도 딸의 애교 한 번에 사르르 녹아 아내의 원성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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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바보들의 사이를 비집고 최근에는 ‘바보 아빠’들이 등장했다. SBS ‘아빠를 부탁해’의 개그맨 이경규, 배우 조재현 등이다. 이미 성장한 딸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이경규는 ‘가택연금’에 비유하는가 하면, 조재현은 딸에게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묵언수행’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우리 딸을 정말 모른다”고 인정한다. 딸에 대한 넘치는 애정으로 ‘잔소리꾼’이 된 배우 조민기, 로맨틱한 아버지를 꿈꾸지만 그 사랑이 조금은 일방적인 듯 보이는 배우 강석우도 있다. 올해 설 연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아빠를 부탁해’는 동년배 아버지들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으며 최근 정규 편성됐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요즘 들어 부쩍 딸과의 관계를 고민하며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아버지가 많다”고 말했다.

 ‘딸 바보’와 ‘바보 아빠’의 경계를 단순히 보면 신세대 아버지와 구세대 아버지로 나뉘는 듯하다. 주로 딸의 사춘기가 부녀 관계의 주요 전환점이 된다. 직장인 김모(31·여)씨는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옷을 갈아입을 때 아빠 몰래 벗고 입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빠도 더 이상 화장실 문을 열고 샤워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아빠와의 사이에서 비밀 같은 것이 생긴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딸이 신체에 변화가 생기고, 이성 친구 등을 사귀게 되면 가족 중 아버지와 제일 정서적으로 멀어진다. ‘남자가 무슨 집안일이야’ 하며 아버지들을 자녀 양육의 주변인으로 내몬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강학중 소장은 “딸이 성숙해질 때쯤 아버지들은 직장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며 “이때 스킨십이나 대화가 줄어들면 딸이 성인이 돼도 서로의 주변만 맴돌게 된다”고 말했다.

 이 시기쯤 종종 생기는 아버지와의 불화는 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특히 물리적 폭력은 독이다. 김모(24·여)씨는 “중학교 때 술 취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어 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아버지가 ‘인사를 안 한다’며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며 “지금은 그때 일을 잊고 별문제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대하기 조금 불편하다”고 고백했다.

 세대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버지와 딸이기 이전에 20~30세 이상은 차이 나는 남녀. 가치관도, 생각도 다르다. 게다가 복잡다단한 ‘여성들의 언어’, 특히 젊은 여성들의 언어를 중년 남성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신경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들면 뇌의 영역 중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지는데 이 부분은 추리나 판단, 공감 등 고차원적 사고를 하는 곳이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아버지들은 언어에 약한데 딸들은 언어를 원한다”며 “딸들은 그만큼 섬세함을 원하지만 우리 아버지들의 능력치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50대 남성 A씨는 딸의 빨래통에 자신의 속옷을 같이 넣었다가 "왜 더럽게 아빠 속옷을 내 빨래통에 넣느냐”며 화를 내는 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친구 같은 아빠’ ‘애인 같은 아빠’ 되기에 성공한 아버지도 많다. 개인 사업을 하는 이재황(58)씨와 첫째 딸 이지현(28)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 각별한 사이를 자랑한다. 이씨는 딸 지현씨가 처음 생리를 한 날 ‘초경파티’를 해줬다. “그날 아내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딸이 또래보다 초경이 늦어 아내가 많이 걱정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무척 기뻤죠.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와서 둘째인 아들까지 가족 모두 딸을 축하해줬어요.” 지현씨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며 새로 사귄 남자친구, 직장 상사 이야기 등 소소한 대화들을 나누곤 한다. 딸 지현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노력을 참 많이 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 항상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했다”며 “그런 아빠를 보면 나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고 말했다.

 놀이교육 전문가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꼭 1분씩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에 한 번은 딸에게 ‘꿈 설문지’를 받아 자라면서 달라지는 딸의 가치관, 꿈 등을 점검했다. 권 교장은 “TV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무작정 ‘우리 이제부터 대화하자’고 하면 역효과만 난다”며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공유할 만한 취미는 없는지 등을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 또한 부녀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나미 전문의는 “엄마가 딸 앞에서 아빠의 흉을 자주 보고 부부싸움 한 얘기들을 많이 하면 딸은 자연스럽게 아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친구 같은 모녀가 합심해 아버지를 소외시키는 경우다. 그래서 진정한 딸 바보가 되려면 먼저 ‘엄마 바보’가 돼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노력은 아버지만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가족상담사들은 딸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요즘 당신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뭘 고민하는지는요?” 강학중 소장은 “딸들은 ‘아버지가 나를 너무 이해하지 못한다’고 푸념하지만 정작 그들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모른다”며 “젊었을 적 아버지 사진을 보며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지,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남자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조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40대 남성 B씨는 이제 열 살인 딸에게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네가 자라서 남자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하는 날이 오더라도, 난 언제나 네 편이다. (추신 : 참고로 아빠 빼고 다른 남자들은 다 늑대란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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