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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린뱌오’ 우파셴, 린 부부 향해 무한 충성심

중앙선데이 2015.04.05 03:17 421호 29면 지면보기
1969년 4월 1일 개막한 중공 9차 전국 대표대회를 주재하는 마오쩌둥(앞줄 왼쪽)과 린뱌오(앞줄 오른쪽). 이 대회에서 린뱌오를 차기 집권자로 확정하고, 예췬과 4대금강을 정치국원으로 선출했다. [사진 김명호]
공군 사령관 우파셴(吳法憲·오법헌)은 열 다섯살 때 고향을 떠났다. 제 발로 홍군 유격대를 찾아갔다. 노래를 워낙 잘해서 귀여움을 받았다. 다섯 차례에 걸친 국민당 군과의 전투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2년 후 청년 장군 린뱌오(林彪·임표)가 군관 계급장을 달아줬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0>

홍군 역사상 최연소 군관이다보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우파셴이 모는 자전거 뒤에 타본 여 전사들은 한결 같은 회고를 남겼다. “남자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잘 생긴 건 별 게 아니다. 우파셴은 미남은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귀여운 남자였다. 붓글씨도 잘 쓰고 자전거도 잘 탔다. 어디서 배웠는지 미국 민요를 잘 불렀다. 목소리가 곱고 발음도 기가 막혔다. 듣다 보면 봄바람 같았다. 피아노도 잘 쳤다. 요리도 잘했다. 전쟁이 끝나면 골목에서 작은 음식점 내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찐만두와 국수 솜씨는 일품이었다.”

우파셴은 장정(長征)도 처음부터 끝나는 날까지 참여했다. 항일전쟁 기간에는 남방 유격대(신4군·新四軍)의 정치위원으로 전쟁터를 누볐다. 일본 패망 후에는 신4군을 이끌고 동북 땅을 밟았다. 동북 민주연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린뱌오는 옛 부하를 중용했다. 우파셴도 린뱌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도처에서 국민당 군을 격파했다. 생긴 건 판이했지만 ‘꼬마 린뱌오’라는 별명이 붙었다. 1955년 중장 계급장과 함께 훈장이란 훈장은 다 받았다. 모두 린뱌오 덕이었다. 공군 사령관에 부임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문혁 초기 공군 조반파(造反派)들에게 맞아 죽을 뻔 했을 때도 우파셴은 린뱌오의 도움을 받았다. 조반파들은 우파셴이 숨어있는 동굴을 포위했다. 당장 나와 비판 받으라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췬(葉群·엽군)이 달려와 조반파들에게 불호령을 내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췬은 임기응변에 능했다. 왕년의 명 아나운서답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조반파들에게 쏘아 부쳤다. “타이완 정찰기를 추락시킨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사령관이 직접 지휘했다. 너희들은 사령관이 도망갔다고 난리를 피지만, 지금 사령관은 주석과 부주석의 위임을 받아 중요한 작전을 수행 중이다.”

예췬이 마오쩌둥과 린뱌오를 거론하자 조반파들은 군말없이 산을 내려갔다. 위기를 넘긴 우파셴은 전군의 부총참모장까지 겸직했다. 중앙 정치국원에 임명하겠다는 린뱌오의 제의에 마오는 토를 달지 않았다.

1 문혁 초기의 예췬(앞줄 왼쪽 세번째)과 4대금강 부부.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우파셴. 뒷줄 왼쪽부터 리쭤펑, 황용셩, 치우후이쭤.
우파셴은 린뱌오의 은혜에 감격했다. 부하들에게 대놓고 말했다. “나는 말로만 공군 사령관일 뿐이다. 린뱌오 부주석이 우리의 진정한 사령관이다.” 사람들 입에서 린뱌오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훌쩍거렸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주석의 만수무강이다. 내 머리 속에는 린뱌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린뱌오와 예췬이 시키는 일이라면 내 판단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무조건 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린뱌오의 주구(走狗)다.” 공군의 모든 문서 앞에 “부주석에게 충성한다”는 말을 명기하라고 지시했다.

2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가운데) 일행과 군사회담을 마친 황용셩(왼쪽 네번째)과 리쭤펑(오른쪽 네번째). 1970년 4월 베이징.
우파셴의 린뱌오 부부에 대한 충성심은 끝이 없었다. “하늘이 변하고, 땅이 변하고, 우주가 변해도, 부주석에 대한 나의 붉은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겠다. 나뿐만이 아니다. 후손들도 자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부주석의 충성스런 전사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가루로 변해도 부주석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두 살 어린 예췬에게는 “엄마로 부르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말까지 했다. 우파셴은 진실한 사람이었다. 아부가 극에 달했다고,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린뱌오와 리쭤펑(李作鵬·이작붕)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린뱌오는 항일 군정대학 교장시절부터 리쭤펑을 총애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말 수가 적고 음흉하다. 잘 키우면 재목 감이다.”

1962년 여름 해군력 강화를 구상하던 린뱌오는 한직에 있던 리쭤펑을 해군 부사령관에 발탁했다.

리쭤펑은 지하 활동에 능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다. 문혁이 발발하자 타도 대상으로 전락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1967년 4월 비판장에 끌려나갔다. 보고를 받은 린뱌오는 예췬을 불렀다. 내 옛 제자를 구해줘라.” 예췬은 남편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했다. 해군 조반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주석이 급한 일로 리쭤펑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린뱌오는 풀려난 리쭤펑을 비밀장소에 숨겨놓고 보호했다.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리쭤펑의 등을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에 대한 비판을 허락하지 않겠다. 죽은 후에도 너에 대한 비판을 허락하지 않겠다.” 린뱌오는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리쭤펑도 화답했다. “함께 하겠습니다. 살아서도 함께 하고, 죽어서도 함께 하겠습니다.” 3년 후 리쭤펑도 린뱌오의 배려로 정치국에 입성했다.

린뱌오의 4대금강(四大金剛)중 나머지 한 사람 인 치우후이쭤(邱會作·구회작)는 황용셩(黃永勝·황영승), 우파셴, 리쭤펑보다 발탁 과정이 더 복잡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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