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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박 대통령 영어가 콩글리시라고요?

중앙일보 2015.04.04 00:05 종합 24면 지면보기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일전에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영어 조문록’ 실수”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이 과연 ‘브라보-유어-라이프(Bravo-Your-Life) 식의 콩글리시를 조문록에서 구사한 것인지 궁금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원문을 인용할 필요가 있겠다. 다음 문장이다. “The Korean people join all of Singapore in mourning his loss(한국 국민은 그를 잃은 슬픔을 모든 싱가포르 국민과 함께한다)”.



 이 문장에 대해 ‘어색하다’ ‘틀렸다’는 말이 나왔다. ‘his loss’가 ‘싱가포르 국민이 그를 잃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리콴유 총리가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것인지의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하겠다. “그걸 도대체 누가 따지나.” 박 대통령이 말하고자 한 것은 명확하다. 언어는 결국 맥락의 문제다. 이 ‘사건도 아닌 사건’에 대해 누군가 글을 썼다는 것은 대통령의 영어 구사 능력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영어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더 밀접하다. 내가 알기로 박 대통령의 영어는 훌륭하다.



  한국 사회는 사람을 영어 능력으로 판단한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평균적인 원어민조차 전혀 모르는 현학적인 문법 규칙이나 아리송한 단어를 얼마나 많이 아는지를 따져보는 시험문제를 얼마나 잘 맞히느냐로 사람을 판단한다.



 대통령조차 이런 식의 ‘영어 문법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영국 사람인 나는 물론 영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어는 한국에서 아름답지도 않고 심지어는 ‘언어’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비웃는 도구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지난 12개월을 돌이켜 보면 비판할 빌미가 되는 게 많다. 또 비판을 날리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외국어의 사소한 측면보다 더 좋은 비판거리가 많다.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사안 중에는 훨씬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100만 개는 있을 것이다. 주제를 바꿔서 미안하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지난해 11월 어떤 40대 남자가 한 여중생을 성폭행한 게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가 여중생과 성관계를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에서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인정되는 나이가 지극히 낮은 이유는 일제 시대의 영향이다. 한국은 나이를 올리지 않았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 신문에서 나는 30대 이상의 남자가 13세나 14세 여자아이와 성관계를 맺었음에도 처벌받지 않게 됐다는 기사를 여러 번 봤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게 이유다. 위력을 사용했다는 게 입증되지 않으면 범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13세나 14세 아이가 어린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언론이 보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사람들이 기사에 나오는 남자들의 행위가 가증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의 눈으로 보면 괜찮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나이와 사건의 구체적인 사항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떤 어린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자란다. 따라서 적절한 연령 제한을 새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나는 13세보다는 더 높은 연령이 기준이 돼야 한다고 확신한다.



 ‘합의’가 인정되는 나이를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예컨대 2012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권성동 의원은 16세로 올리려고 했다. 왜 아직도 13세인지 나는 의아하다. 어린이 보호가 점점 더 큰 사회적 화두가 되어가는 것을 감안하면 연령을 법적으로 바꾼다고 해서 손해 볼 정당은 없을 것이다. 셜록 홈즈가 아니더라도 ‘김영란법’이 통과되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연령을 바꾸는 문제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일본 말고 선진국 중에서 ‘합의’가 인정되는 나이가 낮았던 유일한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스페인도 최근 15세로 올렸다. 미성년자 성적 착취에 대한 한국의 법은 아직도 애매하고 약하다는 게 분명하다. 일본의 유산인 현행법에 ‘사요나라’라고 하면서 명백한 메시지를 보내는 게 사리에 맞다. ‘그 법들을 잃은 것을 애도할(mourning their loss)’ 이유가 전혀 없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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