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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 오늘 마지막 붉은밤

중앙일보 2015.03.31 00:36 종합 24면 지면보기


3월 31일은 축구 선수 차두리(35·FC 서울)에겐 특별한 날이다. ‘차범근의 아들’로 시작해 ‘차두리’로 끝나는 축구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날.

뉴질랜드와 오후 8시 평가전서 태극마크 반납
‘차범근 아들’ 그림자와 싸운 15년
“내 축구인생은 3-5로 지고 있어
아버지 이겨야 승리로 끝나는데 … ”
어머니 “이제 4-5로 만든 것 같아”



 차두리는 31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뉴질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차두리는 지난 1월 아시안컵 결승에서 호주에 패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울리 슈틸리케(61) 대표팀 감독은 “이기고 대표팀을 은퇴하라”며 은퇴경기를 마련해줬다. 차두리는 뉴질랜드전 전반 종료 2~3분 전까지 뛰고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날 예정이다.



 지난 29일 본지와 만난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62) 전 대표팀 감독은 “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마친 뒤 은퇴경기 없이 대표팀을 떠났다. 89년 독일 프로축구 레버쿠젠 은퇴경기 때 구단의 배려로 당시 여덟살이었던 두리를 벤치에 앉혔다”며 “‘차범근의 아들’ 로 불리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국가대표 차두리’로 대표팀 은퇴경기를 치러 대견하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오랜 시간 부친의 그림자에 묻혀 살았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98골을 터트린 전설적인 축구 스타였다. 차두리는 지난해 K리그 베스트11 상을 받은 뒤 “차범근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차두리는 태극마크를 단 이후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부침을 겪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는 뽑히지 못했다. 해설위원 자격으로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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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두리는 올 초 박문성 SBS 해설위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실패할 때가 있다. 축구에선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져야 한다. 하지만 실패를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선수와 실패에 끌려다니며 괴로워하는 선수의 차이는 크다. 같은 실패지만 누군가에는 오히려 더 큰 힘이, 누군가에는 큰 벽이 된다.”



 차두리는 2001년 11월 18일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15년동안 A매치 38경기에선 오른쪽 공격수로, 37경기에선 오른쪽 수비수로 뛰었다. 2006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탈락한 뒤 대표팀과 유럽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비수로 변신했다.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차두리는 아시안컵에서 다시 태극마크를 단 뒤 투혼을 불사른 끝에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선 60m 폭풍 질주 끝에 손흥민(23·레버쿠젠)에게 멋진 크로스를 올려 쐐기골을 이끌어냈다. ‘차미네이터(차두리+터미네이터)’ 의 진가를 보여준 명장면이었다.



 차두리의 휴대전화 SNS 문패엔 이런 문구가 달려 있다. ‘날지 못한다면 뛰어라. 뛰지 못한다면 걸어라. 걷지 못한다면 기어라. 당신이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고(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일부다. 차두리는 매번 뛰지는 못했지만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썼다.



 2012년 11월 독일에서 기자와 만났던 차두리는 “내 축구인생을 경기에 비유하면 후반 40분 3-5로 지고 있다. 내 축구인생이 승리로 끝난다는 건 아버지를 이기는 거다”며 “월드컵 4강과 원정 16강에 힘을 보탰으니 3골은 넣은 것 같다. 혼신의 힘을 다해 4-5를 만들면 져도 팬들이 박수를 쳐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 오은미씨는 “두리가 축구인생에서 4-5를 만든 것 같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오씨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남편이 지도하는 경기도, 두리의 경기도 떨려서 직접 못 봤다. 두리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는 가 보려 한다”고 말했다.



 축구협회 직원들은 파주대표팀트레이닝센터 차두리 숙소 방문 앞에 차두리 캐리커처와 함께 ‘차두리 선수 고맙습니다’고 적은 종이를 붙여놨다. 축구협회는 은퇴식에서 등번호 22번과 ‘CHA Duri’가 금색으로 새겨진 대표팀 유니폼과 금색 축구화를 선물한다.



 손흥민은 차두리의 은퇴경기에 함께 뛰기 위해 소속팀을 설득해 대표팀에 합류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팬들도 차두리 같은 전설을 보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며 박수를 부탁했다. 30일 대한축구협회 주관 SNS 팬미팅 이벤트에 참가한 차두리는 “난 참 행복한 선수”라면서도 “내 은퇴경기보다 대표팀의 승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6000여 명이 팬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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