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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듣던대로…속 단단한 10년차 여배우

중앙선데이 2015.03.28 15:05 420호 8면 지면보기
빨간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22일 홍콩에서 열린 제 9회 아시안필름어워드 특별상 시상식에서 만난 배우 고아성(23)의 모습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단아한 갈색 저지 원피스와 상반되게 짙은화장과 표정은 사뭇 강렬했다.

영화 ‘괴물’의 그 소녀 고아성

고아성은 지난해 5월 열린 제 3회 모엣 라이징 스타 어워드의 수상자 자격으로 이번 행사에 참석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지난해 행사는 취소됐지만, 수상 소식에 의문을 갖는 이는 없었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지 꼭 10년이 지났지만 영화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굵직한 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며 진중한 발걸음을 디뎌왔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녀가 조금 달라졌다. ‘설국열차’의 요나로 살기 위해 수 년간 대중 노출을 꺼릴 정도로 한 역할에 천착했지만 이제 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 KBS 드라마 ‘공부의 신’(2010) 이후 5년 만에 브라운관으로 돌아온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에서 당찬 여고생 서봄을 연기하는 동시에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영화 촬영도 마쳤다. 첫 스릴러 영화 ‘오피스’와 차세대 여배우들이 총출동하는 ‘뷰티 인사이드’ 역시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무엇이 그녀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일까.

보고 있노라면 실소를 자아내는 블랙 코미디지만 사실 ‘풍문’이 쉬운 드라마는 아니다. 갑질이 난무하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도 ‘갑 중의 갑’이 줄줄이 등장한다. 내로라하는 정계와 재계 인사도 대형 로펌 한성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 치밀하게 짜여진 판 위의 말처럼 움직이다 보면 누가 진짜 갑인지 실감할 수 밖에 없는 탓이다. 이런 판을 흔드는 것이 바로 한인상(이준)과 서봄이다. 무모해 보이는 10대 커플이 한성 가문에 쳐들어와서 애를 낳는 순간 역학 관계가 뒤틀린다. 잃을 게 없는 아이들은 굳이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으며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의 드라마 출연인데 소감이 어떤가요.
“드라마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되긴 했어요. 최근 몇 년 동안은 영화만 했으니까. 막상 안판석 감독님과 작업을 시작하고 나니 그런 걱정은 모두 사라졌어요. 그동안 찍은 어떤 영화보다 훨씬 더 영화를 찍는 기분이었거든요.”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보통 대본을 받으면 지문이 쓰여 있잖아요. (눈을 찡긋거리며) 하는 식으로. 그런데 안 감독님은 항상 본질만 얘기하세요. 제가 눈을 찡긋하든 코를 찡긋하든 아무 상관이 없고 캐릭터가 가진 근원적인 것만 표현해 내면 되요. 예를 들어 봄이가 처음 인상이네 집에 가서 애기를 낳고 각자 다른 방으로 격리돼 들어가는 씬이 있었어요. 저는 임산부고 몸이 힘드니까 비서가 나가면 바로 앉으려고 했는데,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지금 앉으면 이 집안에 순응하는 거다. 그래서 진짜 깜짝 놀라서 일어났던 기억이 있어요.”

애가 애를 낳는 역할인데, 부담되진 않았나요.
“보통 아역배우의 성장 순리를 완전히 배반하긴 하죠.(웃음) 하지만 아역 출신이라 갖는 부담감은 없었어요. 다만 경험자들이 심사위원이 되는 연기가 몇 가지 있잖아요. 운동선수라든가, 출산이라든가. 그래서 주변에 있는 경험자들을 쫓아다니면서 계속 여쭤봤어요. 유호정ㆍ백지연 선배님이나 엄마한테도 그렇고.”

아이와 어른 경계에서 중간자적 역할 소화
아역 배우로 시작했지만 사실 그녀가 누군가의 아역을 맡은 적은 거의 없었다. MBC 드라마 ‘떨리는 가슴’(2005)에서 보미는 실타래처럼 얽힌 어른들의 문제를 풀어내는 매개체였고, 영화 ‘괴물’에서 역시 납치된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는 어엿한 딸이었다. 그녀 역시 빨리 성인 배우로 성장하기 위해 파격변신을 감행할 생각따윈 없었다. 제 나이에 맞는, 아니 그것보다는 고아성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으니까.

“비주얼과 설정으로만 기억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서봄이나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만지는 왠만한 성인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아이들이예요. 로맨틱 코미디에 나오는 밝고 명랑한 20대보다도요.”

아이와 어른 사이의 경계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소화해온 그녀의 항변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는 작품을 고르는 기준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우선 글이 재밌어야 하고, 둘째로 주체성이 있는 역할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내내 단어 하나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정성주 작가님의 ‘밀회’ 대본을 보니 ‘두 사람이 조용히 들어간다. 공간에 있던 모든 사물들도 눈을 감아주는 것 같다’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대본을 받으면 매일 ‘태백산맥’ 같은 장편 소설을 읽는 기분이예요. 참 재미있어요.”

책 읽는 걸 정말 좋아하나봐요.
“네. 사실 편식이 심하긴 해요. 소설보단 수필을 좋아하죠. 소설은 비현실이니까 상상을 해야 하고 레이어가 두 겹인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서 피로감을 느끼기도 하고. 수필은 자기 이야기니까 더 잘 읽히는 것 같아요.”

평소에 일기도 쓴다면서요.
“열여섯 살 때부터 매일 썼어요. 컴퓨터로 먼저 쓰고 손으로 옮겨적어요. 손으로 먼저 쓰면 생각하는 속도를 못 따라가거든요.”

엮어서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절대 안돼요. 일기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겠다는 전제 하에 쓰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번에 정 작가님 대본을 받으면서 제가 글 쓰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읽고 쓰는 문제에 더 까다로워질 것 같아요.”

또 즐겨하는 일이 있다면요.
“다큐멘터리를 영화보다 많이 봐요. 연기하는 방식 자체가 리얼리즘에서 오기도 하고. 예를 들어 울음에도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우는 씬을 찍는다면 어디선가 실제로 본 울음들을 재현하게 되거든요. 남들이 우는 걸 보면서 아 저렇게 연기하고 싶다 하는 의지가 생기기도 하고요.”

최근에 감명깊게 본 다큐멘터리는.
“요즘엔 드라마 촬영 때문에 많이는 못 봤어요. ‘그것이 알고싶다’ 류의 시사 프로그램도 많이 보는데 백화점 모녀 사건이 인상 깊었어요.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다가 갑자기 터져버린 거예요. 분명 처음에는 화를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래야 돼’하면서 바닥에 드러눕는 걸 보면서 그 터짐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했어요. 실제 생활에서는 감정이 끝까지 가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던 거죠.”

끝나지 않은 변주, 실제와 발현 사이
이는 최근에 그녀가 품고 있는 고민과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를 그대로 재현해내는 연기와 스스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연기 중 어느 것이 옳은가에 대한 갈림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오랜 시간을 들이는 성격이기에 더욱 그랬다.

첫 슬럼프를 겪는 건가요.
“아니요. 사실 ‘설국열차’를 찍고 나서 많이 힘들었어요. 몇 년간 설국열차만 생각하면서 살았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정말 팽팽한 끈이 풀어지는 느낌이랄까. 그 때 생각했죠. 앞으로는 다작을 할 것 같다, 너무 허전하다고.”

늘 ‘센’ 캐릭터를 해서 그런가봐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우아한 거짓말’에서의 집단 따돌림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집 근처에서 촬영하기도 해서 오히려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최근 ‘오피스’ 같은 경우는 감정이 너무 어려운 영화라 촬영 끝난 다음날 바로 혼자 여행을 떠났어요.”

뭐가 그렇게 힘들게 하던가요.
“어느사이엔가 맨날 똑같은 패턴으로 연기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걸 다 버려버리고 새로 리셋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도 하고.”

첫 역할이었던 ‘괴물’속 현서의 변주가 계속된다는 평을 의식한 건가요.
“아, 그 기사 봤어요. 그동안 특정 단어를 꺼내서 생각하진 않았지만 읽으면서 역할마다 책임감이 강했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비슷한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누굴 지키는 역은 아니예요. ‘오피스’에서는 너무 책임감없고 소심하게 나오거든요. 미례의 초반 성격이 실제 제 모습이랑 제일 닮은 것 같아요.”

그럼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역할을 꼽자면.
“우니 르콩트 감독님이랑 했던 ‘여행자’(2009)요. 여러모로 저를 깨워준 영화예요. 작가주의 영화도 처음이었고, 장애가 있는 역할도 처음이었고. 배우들은 그렇게 장치가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고, 똑같이 하려고 노력하고, 거기서 오는 윤리적 문란감이 있어요. 특별한 장치가 부여서 생겨나는 아이덴티티에 관한. 그걸 다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 준 게 여행자였어요.”

영어 공부를 하게 된 계기기도 하죠.
“감독님이랑 소통이 잘 안 됐으니까요. 연출부가 통역해주긴 했는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영어 연기도 다 달랐으면 좋겠거든요. 외국 기차에서 나고 자란 요나(설국열차)와 한국에서 학습지로 배운 봄이의 영어가 같을 순 없잖아요.”

애쉬튼 커쳐ㆍ우마 서먼 등이 소속된 할리우드 언타이틀엔터테인먼트와 지난해 에이전트 계약도 맺었죠. 구체적인 활동 계획도 있나요.
“이번 드라마 시작하기 전까지는 활발히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지금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잠깐 중단한 상태예요.”

그 정도면 갈증은 다 해소된 것 아닌가요.
“홍상수ㆍ안판석 감독님과 새로운 스타일로 작업하면서 많이 해소된 것 같아요. 똑같은 패턴에서 벗어나 접근을 다르게 하게 됐거든요. 두 작품 다 함께 한 유준상 선배님을 보면 에너지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배우들도 보면 종류가 굉장히 많잖아요. 연극 출신도 있고, 아이돌 출신도 있고. 특히 아이돌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쇼맨십인 것 같아요. 등장만으로도 게임 끝, 그게 너무 부러워요. 제가 퍼포먼스가 강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요즘 그게 제 가장 큰 화두예요.”

여전히 자신을 ‘라이징 스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는 “안심이 된다”고 했다. 때로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이 지겨운데 10년이 지나도 아직 새로워 보일 수 있구나 하는 점이 그를 격려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기자 역시 안도했다. 지금의 심리적 내홍을 겪고 나면 우리는 외연이 한폭 더 넓어진 여배우를 볼 수 있겠구나 싶어 말이다.




홍콩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소윤(STUDIO 706)·각 영화사 및 방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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